일본 만화시장이 변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이미 변했다.

  • 0
  • 793 views

웹툰 일을 하다보면 분야를 막론하고 일본 만화시장에 대한 전문적 식견을 자랑하시는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수많은 조각들을 모아 정리하면 일본 만화시장은 이렇게 생겼고, 일본은 시장이 거의 변하지 않고, 때문에 이렇게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이야기로 귀결됩니다. 물론 귀한 의견이지만, 진짜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대적으로 뉴비인 저의 입장에서 한번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고, 그 정리한 결과를 공유할 필요도 있다고 느꼈습니다.

일본의 고민: 원나블이 언제적 원나블

일본은 명실상부 만화 강국입니다. 오늘 칼럼에서 이걸 부정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일본 만화시장은 전세계 약 17조원 만화시장 중 7조원가량, 약 40%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 만화시장은 규모에 따른 고민들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첫번째는 고인물이 되어간다는 것, 두번째는 그게 독자에까지 넓어지고 있다는 것, 세번째는 규모가 크다보니 이걸 깨기 쉽지 않다는 겁니다.

첫번째, 고인물은 ‘원나블’이라는 대명사로 대표됩니다. <원피스>, <나루토>, <블리치>로 이어지는 일본만화의 황금기(또는 슈에이샤의 황금기)가 길어도 너무 길게, 호황이어도 너무 호황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나루토>와 <블리치>는 끝났는데, <원피스>는 아직도 원피스입니다. ‘망가젠칸’이 제공하는 역대 만화 발행부수 압도적 1위는 <원피스>입니다. 5억부를 돌파한 최초의 만화가 된 <원피스>는 최종장 돌입을 예고하며 판매부수를 끌어올리고 있죠.

그런데 이들이 나이를 먹고 있는게 문제입니다. 만화 자체의 문제라기보단 인구구조의 문제인데, 일본은 우리나라와 더불어 전세계에서 가장 빨리 고령화되는 국가 중 하나입니다. 일본 만화 시장에서 ‘만화를 읽는다’고 답한 독자들이 가장 많은 연령대는 30~39세였고, 그 뒤고 20~29세였습니다. 여기까지 봐도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되시나요?

이제 얘기가 좀 다릅니다. 비율로는 20~29세가 더 많지만, 실제 인구 구성비로 따져보면 20~29세는 전체 인구의 9.8%, 40~49세는 전체 인구의 13.9%로 40~49세 독자가 20~29세 독자보다 많습니다. 50~59세 독자는 전체 인구의 13.8%로 비슷한 수준입니다. 숫자로 보면 40~49세의 ‘만화를 읽는다’고 답한 독자는 대략 865만명, 20~29세의 경우는 683만명 정도로 나타납니다. 백분율로만 보면 나이가 들수록 만화를 안 읽는 것 같은데, 실제 인구수로는 이 독자들의 숫자가 앞으로 늘어날 예상 독자의 수보다 많습니다. 이건, 한국도 앞으로 거치게 될 흐름입니다.

<원피스>가 아직도 1위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인구로만 보면 아주 답이 간단합니다. 지금 40~50대가 10~20대일 때 가장 유행하던 만화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만화 시장의 지형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2019년부터는 디지털 만화가 출판만화(잡지+단행본) 판매량을 넘어서기 시작했고, 지난 4년간 단 한번도 역전 없이 꾸준히 격차를 벌리고 있는 중입니다.

이정도까지 상황이 오면, 흔한 말(?)로 ‘구조적 개혁’이 불가피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구조를 바꾸어야 할 시장이 7조원 시장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먹고살고 있는, 직접 종사자의 숫자만 어림잡아 40만명입니다. 이 산업의 ‘구조적 개혁’이 가능하긴 할까요?

코로나와 <귀멸의 칼날>이 바꿔놓은 것

앞서 말한대로, 그냥 개혁을 하려고 해도, 침체기를 겪었어도 세계 1등인 산업을 아무 명분 없이 개혁하긴 어렵습니다. 물론 준비중인 것들이 있었겠지만, 표면상의 이유도 꽤나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일본 만화계 뿐 아니라 전세계 모든 분야를 들썩이게 만든 사건이 2020년 터지고 맙니다. 바로 코로나19죠. 코로나19로 인해 세상이 멈춰버렸고, 당시만 해도 ‘육필원고를 받지 못해’ 일을 멈춘 편집부의 이야기가 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일본 만화계는 이 시기를 통해 얻은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귀멸의 칼날>의 성공입니다.

일단 지표로 보면, 역대 누적 발행부수 중 <나루토>는 2억 5천만부로 5위, <블리치>는 1억 3천만부로 11위에 위치했는데, 이 사이에 2010년대 연재를 시작한 만화는 <귀멸의 칼날>과 <진격의 거인> 딱 두 종뿐입니다. 이 두 종은 모두 애니메이션으로 대박이 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는데요, 코로나19 시대에 일본은 두가지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애니화와 넷플릭스죠.

그동안 일본 만화의 방식은 ‘압도적인 인기만화’ 1종이 잡지를 이끌고, 단행본을 판매하고, 같은 잡지에 연재되는 작품들의 단행본 수익이 함께 증가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명탐정 코난>의 사례처럼 1종의 인기작이 잡지 하나를 이끌어가는 것도 가능한데, 그걸 몇 개씩 가지고 있던 슈에이샤가 잡지만화 시대의 제왕이었던 건 아주 자연스러운 수순입니다.

그런데, 그게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2019년 이미 잡지+단행본 시장이 전자만화(출판만화 형태로 온라인 서비스되는 만화) 시장에 밀렸고, 이후 그 간격은 점점 벌어질 것이 뻔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장기 연재작이 유리할까요? 당장은 그럴 겁니다. 그리고, 당장은 장기연재작이 시장을 주도하는 것처럼 보일 겁니다. 여기에 균열이 나기 시작한 건, <귀멸의 칼날> 애니메이션이 초대박 흥행을 보여줄 즈음입니다.

<귀멸의 칼날>의 등장은 “연재-단행본-애니메이션-극장판-애니메이션-단행본 완결-극장판” 이라는 사이클이 대성공을 거둔 것은 말하자면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단행본 시장이 침체기로 접어들고 있을 때, 새로운 비즈니스모델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으니까요. 물론, 그 전에도 애니메이션화를 통한 비즈니스는 있었지만, 그건 단행본 판매 촉진이 주가 되는 사업이었습니다. IP확장이라기보단 OSMU를 통한 시너지에 가까웠죠.

그런데 이게 넷플릭스를 만나면서 글로벌에서 무지막지한 히트를 쳐버립니다. ‘애니메이션은 풀이 좁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나가서 보니까 꼭 그렇지도 않았던 거죠. 이후 우리는 2020년대 대 애니메이션 시기를 맞습니다. <체인소 맨>, <스파이 패밀리>, <최애의 아이>, <장송의 프리렌>에 이르기까지 기대작은 물론, <던전밥>, <약사의 혼잣말>등 생각 외로 화제가 된 작품들도 있습니다.

세상에, 트와이스가 공식 틱톡에 우타이테를 하질 않나, 아이브 라이브 현장에서 장원영이 챌린지를 하는가 하면, 소위 아이돌 ‘자컨’에서 애니메이션을 본다고 말하는게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 된 거예요. 이제 단행본만 파는게 아니라, 각종 콜라보 상품부터 굿즈까지 애니메이션으로 세일즈를 하는게 가능해졌습니다. 아니, 이전에도 가능은 했는데 이렇게까지 폭넓지는 않았죠. 만화를 안 보던 사람들도 ‘애니는 보게’ 할 수 있으니까요. 원래 소비하던 사람만 소비하는게 아니라, 소위 '인싸'들도 만화를 보고 따라하는게 유행처럼 번지는 시대라니요.

자본이 향하는 곳에 질문이 있다

일본만화시장은 내수로만 7조원 시장이었습니다. 바꿔 말하면, 내수가 거의 전부인 시장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일본 망가시장은 폐쇄적이고, 빠르게 시장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확실한 소비자에게 객단가를 높이는 방향으로 진화해왔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2차수익 구조를 보면 굿즈가 49%, 파칭코(아케이드)가 22%에 이를만큼 철저히 내수에서 객단가를 높이는 전략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망가라는 거대한 세계의 틀은 유지하고 연착륙하면서, 천천히 시장의 체질을 바꿀 수 있는 방법으로 선택된 것이 넷플릭스를 포함하는 애니메이션 시장입니다. 넷플릭스가 포함된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작사의 이익을 무조건 보장해주는 구조를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콘텐츠 비즈니스는 기본적으로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의 구조를 가져갈 수밖에 없는데, 넷플릭스는 제작위원회를 꾸려서 간섭받지 않고, 매출에서도 어느정도 자유로운 예산을 짤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한마디로, 실력있는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이 안정적으로 수익을 확보하고 ‘모험을 걸 만한’ 작품들이 늘어났다는 얘깁니다. 대표적인 것이 MAPPA가 100% 투자한 <체인소 맨>같은 애니메이션입니다. ‘모험’을 걸어본다는 건, 실패하더라도 다른데서 수익을 어느정도 보전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걸 가능하게 해 준 것이 넷플릭스구요. 여기에 민영 방송사들이 많은 것도 한몫 합니다. 한마디로 ‘중심이 되는’ 몇 개 회사가 꾸려서 불만이 나왔던 제작위원회 시스템에 경쟁이 도입되었다고 거칠게 요약해볼 수 있겠습니다.

아마존과 애플, 글로벌 경쟁의 시작

자, 일단 정리를 한번 해 보죠. 코로나19로 일본도 급격하게 디지털 전환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넷플릭스에서 애니메이션이 ‘터진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합니다. 그러면서 체질개선과 애니메이션-글로벌화를 투트랙으로 진행할 수 있는 틈이 생깁니다. 경착륙(Hard-Landing)이 아니라, 연착륙(Soft-Landing)이 가능해지는 거죠.

이미 슈에이샤는 ‘점프툰’을 런칭하는 한편, 잡지만화계에선 이례적으로 연재 경력 작가를 최저 원고료까지 공개하면서 모집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업계 1위의 ‘원고료 공개’는 일본 만화계를 술렁이게 하기 충분했습니다. 온/오프라인으로 직접 설명회까지 열면서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 건 이례적입니다. 이건 ‘시대가 변하고 있다’고 보기에 충분합니다. 실제로 이걸 뒷받침할만한 근거도 있습니다. 지난 20년간 왕좌를 지킨 슈에이샤의 화제작은 “소년 점프”가 아니라 스마트폰 매체인 “소년점프 플러스”와 “주간 영 점프”에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소년점프 플러스”쪽은 <체인소 맨> 1부, <스파이 패밀리>, “주간 영 점프”는 <최애의 아이>가 대표적입니다.

이렇게 빠르게 전환이 일어나는 디지털 시대, 잡지만화는 점점 더 궁지에 몰리고 있습니다. 잡지는 물리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 말고도, 넓은 유통망을 보유해야 한다는 진입장벽을 동시에 가진 안전한 성이었습니다. 그런데 디지털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강력한 플랫폼을 갖춘 아마존과 애플, 그리고 라쿠텐이 일본에서 웹툰 사업을 시작한 겁니다. 기존 출판 유통망이 무용지물이 되었다면, 온라인에서 쌓아온 유통망도 충분히 승부를 걸어볼 수 있는 판이 깔린 거니까요. 이제 글로벌에서, 각자의 무기로 싸우는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은 수많은 변수 중 하나의 키 중 가장 먼저 눈에 띈 해답입니다.

아직도 일본이 ‘장기연재’에 매몰되어 있다고 보이시나요? <귀멸의 칼날>이 불러온 엄청난 파도가, <스파이 패밀리>의 반향이, <최애의 아이>가 불러온 파급이 미친듯이 몰아치는 건, 단순히 ‘대작’이 많이 나왔기 때문이 아닙니다. 일본이 망가를, 그리고 애니메이션을 다루는 태도가 결정되었다고 보는게 옳다는 것이 에디터의 생각입니다. 앞으로도 여러 레이더를 켜두고, 에디터는 할 얘기가 생기면 또 찾아오겠습니다. 그럼 다음 칼럼에서 만나요!

남해군, 웹툰작가 등 예술가에 레지던시 제공한다
Prev Post 남해군, 웹툰작가 등 예술가에 레지던시 제공한다
후지모토 타츠키의 "룩백", 극장판 애니화 된다
Next Post 후지모토 타츠키의 "룩백", 극장판 애니화 된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