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과 인종차별, 플랫폼의 책임은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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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웹툰계에 입맛이 씁쓸한 뉴스들이 있었습니다. 몇 건의 표절시비, 그리고 해외에서 있었던 인종차별 논란으로 인한 연재 중단까지. 오늘은 이 뉴스를 다룰 겁니다. 사실 조회수를 생각하면 그러면 안 되지만, 웹툰인사이트에서는 자극적으로 이 소식을 다루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논란 자체보다 그로 인해 촉발된 문제들, 그리고 그 원인에 대해 살펴볼 겁니다.

당연히 속시원하지도, 명쾌한 해결책을 가지고 오지도 않을 겁니다. ‘어떤 점이 표절인가’ 또는 ‘어떤 점이 인종차별인가’를 다루는 것은 쉽지만 의미가 없습니다. 원인에 대해서, 그리고 책임에 대해서 호통치는 건 속은 시원하지만 누가 어떤 원인을 제공했고, 그걸 어떻게 예방할 것이며, 누가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 완전한 필터링이 가능한가?

가장 먼저 이야기해볼 건 편집부에서 표절을 완전히 필터링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깁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가능합니다. 이건 담당자의 담당작이 너무 많기 때문도, 다른 어떤 이유가 있어서도 아닙니다. 인간이 연재되는 모든 작품을 다 보고, 작품을 검수하면서 그걸 모두 잡아내는 건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공지능이 하더라도 페이지 만화와 웹툰의 스크롤 연출의 차이를 감안하고 잡아낼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복사 붙여넣기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게 아니라, 감상 후 재창작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유사성 논란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아예 대고 그리는 트레이싱은 기술로 커버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연출이 유사하다거나 구도나 대사의 뉘앙스가 비슷한 것, 장르적 장치가 겹치는 것을 전부 표절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기 때문에 아주 어려운 문제입니다. 때문에 필터링으로 이를 차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은, ‘유명한 작품은 안된다’ 정도 말고는 딱히 의미가 없습니다. 적어도 표절에 있어서는 그렇습니다.

* 도덕적 해이, 고민할 수 없는 시간적 여유

그럼 이제 표절시비를 다루어 보도록 하죠. 사실 장르 클리셰라고 정해진 것들은 수없이 반복되면서 굳어진 일종의 약속입니다. 이걸 ‘표절’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연출의 구도부터 대사, 상황이 모두 유사하다면 이건 당연히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표절은 법적인 문제보단 도덕적인 문제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개인의 도덕적 책임을 묻는 건 당연한 수순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개인의 도덕적 책임을 묻고 훈계하고 끝날 문제인지 의문이 남습니다. ‘왜 해이해졌는가’에 대한 답을 아직 생각해보지 못했으니까요.

사실 도덕적으로 ‘해이해지고’ 싶은 사람은 많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 유혹이 있고, 그걸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약해져 있을 때, 그 ‘해이함’이 발현되는 것이라고 에디터는 믿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표절 논란이 끊이지 않는 걸까요?

일단 에디터는 이 문제에서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주간마감이라는 끊임없는 압박이 작용한다고 생각합니다. 주간마감은 지속적으로 시간에 쫓기는 상황을 만드는 가장 큰 원인입니다. 물론 누군가는 ‘그렇다고 모두가 베끼는건 아니잖아!’라고 하실지도 몰라요. 저도 그 얘기를 하는게 아닙니다. 가장 근본적인 책임은 그걸 실행에 옮긴 것이라는 걸 부정하는 건 아니예요. 다만, 작가에게’만’ 책임을 묻고 개인의 일탈이라는 말로 지워버리기엔, 시스템의 가혹함이 있다는 얘깁니다.

주간연재의 굴레에서 작가는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혼자서 작업을 해야 하는 환경에서 ‘딱 한번만’ 하면서 선을 넘어가기 쉬운 상황이 되는 거죠. 충분히 작품에 대해서 고민하고, 영향을 받더라도 오마주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볼 물리적인 여유가 없다면 ‘유혹’은 구체적인 해결책으로 둔갑하기 쉽습니다.

이 때는 사실 쉬어야 합니다. 잠시 멀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작가가 원하지 않는데 강제로 휴식을 취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휴재는 곧 수익 부재와 같으니까요. 당연히 작가가 계속해서 연재를 원하게 되는 시스템을 어느정도 보완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계속해서 있어왔습니다. 그럼에도, 휴식보다 작업을 택하는 작가를 막을 수 없다는 점이 유혹에 노출되기 쉬운 환경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오해가 있을까봐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작가가 혹독한 환경에 처해있으니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대로 가져다 베낀 것은 당연히 잘못이고, 상황에 따라 잘못의 크기가 줄어든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다만, 작가 한 명을 비난하고 그가 모든 잘못을 했으니 문제가 사라졌다고 보아선 안된다는 얘깁니다. 언제나 이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시스템을 정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 ‘여기선 그래도 되니까’, 바꿔 말하면 ‘거기선 안 되니까’

다음은 인종차별 논란으로 넘어가 보죠. 이미 에디터는 칼럼으로 몇 번이나 이제는 ‘글로벌 경쟁의 시대’라고 말했습니다. 이유를 보다 적나라하게 이야기 해보자면, 한국은 이제 인구가 줄어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출생률이 역대 어느 때보다 낮다는 이야기를 굳이 할 필요도 없이, 앞으로 10년 뒤면 대학들이 줄줄이 문을 닫는 걸 보게 될 겁니다. 이건 예정된 미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줄어들 겁니다.

한국의 기준으로 한국에서 만화를 만들어서 한국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건, 지금 할 수 있는 전략입니다. 지금 작가들이 고민해야 하는 건, ‘내가 재미있는 걸 글로벌 시장에서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고민입니다. 오히려 바로 그렇기에 여기서 담당자의 역할이 중요해집니다.

유사성을 완전히 따지기 어려운 표절과 달리, 인종차별을 비롯한 혐오표현의 문제는 적절한 문제제기로 멈출 수 있습니다. 커뮤니티 단계가 아니라 적어도 프로듀싱의 단계에선 그렇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된 작품은 심지어 스튜디오에서 프로듀싱을 하는 작품이었습니다. 작가, 스튜디오 담당자, 플랫폼 담당자까지 최소 3단계의 필터가 있었음에도 멈추지 못했다는 것에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다.

 

작가 인스타그램에 게재된 사과문

 

작가들은 “저희는 역사적으로 대체적으로 동질적인 사회에서 태어나 자랐고, 인종차별 문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며 “저희의 무지로 인종차별적이며 유해한 표현을 사용해 상처를 드린 점에 깊이 사과드린다”고 밝혔습니다.

바로 여기에, 이번에 문제가 된 원인이 있습니다. 우리는 인종차별 문제의 역사와 맥락에 대해 잘 모릅니다. 잘 모르면, 치열하게 취재하고 고민했어야 합니다. 한국 내에서만 소개될 작품이어도 그랬어야 하는데, 글로벌 동시연재가 되는 작품이라면 더더욱 그랬어야 합니다. 취재를 안 했다는 말이 아니라, ‘한국인의 입장’으로만 생각한 것이 문제라는 지적입니다.

어떤 문제에 당사자성이 없으면 다루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심지어 한국인은 인종차별의 피해자이기도 하고, 또 가해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창작자가 다루고자 하는 문제가 있을 때, 그것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논의해보지 않은 채 다루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얘깁니다. 적어도 브레이크가 한번 걸렸다면, 표현을 삭제하고 사라지게 하는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라는 얘깁니다. 그게 창작을 곧 고통이라고 하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니까요.

 

* 플랫폼의 ‘윤리’와 동시대인, 그리고 악의 평범성

끝으로 다시 한번, 플랫폼의 책임을 묻고자 합니다. 네이버는 지난 칼럼으로도 다룬 적 있는 단 23(DAN 23) 행사에서 인공지능 윤리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네이버는 수많은 데이터를 모아서 대한민국의 평균적인 생각을 도출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기준으로 삼겠다는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거대한 한국인 두뇌의 총합을 만들고, 그것을 한국인의 인공지능 윤리로 접목시키겠다는 말입니다. 언뜻 들으면 맞는 말인가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네이버는 책임을 회피하는 도구로 윤리를 사용하고 있다는 지적을 피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한국인이 이런 걸 어쩌라는 말이냐!로 윤리적 책임을 피하겠다는 아주 쉬운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한국 사회의 수준을 넘어서지는 못한다'고 네이버는 밝히기도 했죠. 긍정적으로 평가하자면 네이버가 일종의 '선'을 그었다고, 에디터는 생각합니다. 네이버의 이 기조는 네이버의 전 서비스에 비슷하게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그어주는 ‘선’은 누군가에겐 “이런 정도는 괜찮구나”라는 청신호로 읽힐 수 있습니다. 거기에 빅데이터가 끼어들면 ‘다수의 생각이 이렇다’는 확신까지 쥐어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계에서는 어떨까요?

 

네이버 DAN 23 중 인공지능 윤리 발제화면 중 일부(출처: DAN 23 발제 직접 캡처)

 

충분한 논의와 논쟁 없이 ‘선’이 그어지면 그 안에서 데이터를 제공하게 될 논쟁 자체는 어떻게 작동할까요? 마치 위키 페이지처럼 부지런한 사람이 이겨서 스스로 권위를 갖는, 챗바퀴 안에 갇히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 심지어 네이버가 공개한 챗봇은 나무위키를 자꾸 레퍼런스로 가져오기도 했네요.

조르조 아감벤은 “자신의 시대를 증오하지만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을 동시대인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가 말한 동시대성은 “시대에 완전히 일치하는 자들”은 동시대인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시대의 요구에 불응하고 불화하면서 고민하는 것을 동시대성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아감벤의 동시대성은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과도 이어집니다. 고민하지 않으면, 시대에 순응하면 악이 되기 쉽다는 말입니다. 즉, 악이란 적극적인 판단이나 개입이 아니라 '고민하지 않는' 그 자체라고 현대 철학자들은 지적합니다.

네이버는 인공지능 윤리기준에 대해 판단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 ‘고민 없음’이 곧 악화로 가는 길이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플랫폼이 책임지지 않기 위해 시대의 윤리에 대해 판단을 멈추는 것이 선일 수는 없다고 에디터는 생각합니다. 시대가 흘러가는 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겠다는 말 또한, 피해야 할 극단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네이버웹툰이 밝힌 네이버웹툰의 월간 이용자는 1억 7천만명에 달합니다. 네이버웹툰은 네이버 글로벌 진출의 첨병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문화의 차이로 인한 문제는 계속해서 발생할 겁니다. 그때마다 작품의 연재를 종료하고 없던 셈 치는 건, 어디에도 큰 도움은 안 될 겁니다. 그런 태도로는 잘못은 작가에게만 있고, 플랫폼은 고민하지 않는 존재로 남을 테니까요. 결국 고민하지 않는 존재, 고민하지 않는 창작은 지루합니다. 우리는 '나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토론하는게 아니라, 우리의 삶이 지루하고 무의미하지 않도록 고민해야 합니다. 주간마감이라는 시스템이 작가를 고민하지 못하게 해서 지루하게 만든다면 그것을 고쳐 쓸 수 있는 논의를 지속해야 하고, 플랫폼이 고민해서 내놓은 윤리의 테두리가 고민하지 않는 방향, 책임지지 않는 방향으로 향해 있다면 그 또한 논의하고 고민해봐야 할 문제일 겁니다.

바로 이 지점이 우리가, 그리고 플랫폼이 고민해야 하는 지점입니다. 작가에게 간섭하지 않되, 치열하게 고민중인 사람들의 논의에 함께하는 것 말이죠. 플랫폼에 너무 많은 책임을 요구하나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한달 방문자가 1억 7천만 명입니다. 대한민국 인구는 그 1/3도 채 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글로벌에서 고민해야 합니다. 고민을 멈추는 순간, 우리는 뒤쳐지게 될 겁니다. 어쩌겠어요? 계속 치열하게 고민해야죠. 그게 우리를 '덜 지루하고 덜 악하게' 만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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