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탕 3화] 내 맘대로 될 거긴 한데 ‘재미’있게는 해 드릴게

로맨스판타지 장르는 뻔하다. 어차피 주인공의 욕망대로 실현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로맨스판타지의 뻔하다는 평가는 장르물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기도 하다. 독자는 예상되는 바를 충족시켜줄 것이라는 기대로 장르물을 감상하고 독자가 기대하는 장르물에서의 새로움은 기대한 바를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허용된다. 그래서 장르 규칙에 매료된 독자는 다시 만족을 느끼기 위해 그 장르를 선택하고 장르물은 이러한 과정의 반복으로 대중화되며 뻔한 재미에 의지한다. 한편에서는 장르물이 주는 뻔한 상투성과 진부함이 재미없는 이유라고 지적한다.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 반복되는 이야기는 감상의 지평을 넓히긴 어려울 것이란 우려다. 로맨스판타지도 이 우려를 고스란히 받고 있다. 

 

로맨스판타지가 뻔해서 감상의 지평을 넓히지 못하고, 재미가 없다고? 독자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갸웃할 것이다. 독자는 로맨스판타지가 장르의 상투성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다시 써가며 새로움을 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로맨스판타지의 재미를 둘러싼 서로 다른 기대와 우려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면 양측이 말하는 ‘재미’의 진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이 작가가 되어 쓰는 로맨스판타지

로맨스 판타지의 주인공은 잘 알고 있는 이세계에 엑스트라나 악역, 비중이 적은 조연처럼 원작에서 주목받지 못한 캐릭터로 빙의해 이야기를 변형한다. 잘 알고 있는 세계라는 것은 주인공에게 엄청난 권능을 선사한다. 원작을 토대로 패러디 작품을 쓰는 한 명의 작가 시선으로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으므로 대부분 주인공의 뜻대로 된다. 주인공이 신처럼 군림하여 뜻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이야기의 긴장감은 유지되기 어렵다. 

 

흥미로운 것은 이 주인공이 우리가 대부분의 이야기에서 납작하게 설정된 악녀나 이름조차 부여되지 않았던 엑스트라, 조연으로 빙의한다는 것이다. 타 장르에서 악역이나 엑스트라, 조연이 등장하는 이유는 주인공 위주의 이야기를 진행 시키기 위해서다. 그들의 행동이나 대사는 주요한 관심에서 벗어난다. 그런데 로맨스판타지의 주인공은 그들의 행동과 대사에 의문을 품고 다른 생각을 가졌던 이들이다. 그래서 로맨스판타지는 주인공이 작가가 되어 쓰는 한 편의 패러디가 된다.

 


‘나’대로 살기를 욕망하고 연대하고 실현하는 주인공의 이야기

로맨스판타지의 길항은 여기에서 발생한다. 수많은 이야기에서 보인 캐릭터 유형에 저마다의 사연을 부여해서 이야기가 진부하게 생성되려 할 때마다 방해하고, 이 장르를 많이 읽은 독자라면 느꼈을 법한 바람이 공감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표현해 재미를 선사한다. 

 

 <그 악녀를 조심하세요!>에서는 ‘뻔한 스토리의 소설’ 속 악녀로 빙의한 주인공(멜리사 포데브라트)이 등장한다. 주인공은 원작처럼 악녀로 살거나 개과천선해서 성녀가 되거나 남자 주인공들의 사랑을 받고 싶은 욕망 따윈 없다. 그저 조용히 공작가의 영애(돈 많은 백수)로 살고 싶기에 약혼자인 황제에게 ‘파혼’해달라는 서신을 49번이나 보낸다. 주인공은 파혼을 요구하는 와중에 멜리사가 악녀로 비춰진 이유를 알게 되는데 악녀란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정의된 이름이란 것이다. 주인공은 멜리사의 악녀라는 설정을 이용해 멜리사가 멜리사 자체로 존재할 수 있게 만든다. 게다가 원작에서는 적대적 관계였던 유리(원작의 주인공)와 ‘여적여’ 관계를 뛰어넘어 연대함으로써 주체적으로 살 수 있도록 돕는다. 

 

로맨스판타지에서 보여야 할 멋있고 지체 높은 남자 주인공의 모습은 <그 악녀를 조심하세요!>에서 보이지 않는다. 주인공이 보기에 네 명의 남자 주인공은 바람둥이, 스토커, 철부지, 집착남으로 보일 뿐이므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희생하고 수동적으로 사는 유리를 가만히 두고 볼 수 만은 없다.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들에게 일침을 가하고 유리와 연대함으로써 기존의 로맨스 장르에서 보이던 수동적인 여성 캐릭터의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을 보여준다. 로맨스, 로맨스판타지를 떠올릴 때 자동으로 그려지는 이야기의 뻔함을 보란 듯이 벗어던지는 담대함과 통쾌함은 여성이 주인공인 이야기로 다시 써졌다.

 

△ <그 악녀를 조심하세요!> 71화 中

 

 

빙의한 로맨스 소설 속 주인공 ‘유리’가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주체적으로 행동 못하는 상황에 대해 멜리사는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느낀다. 이후에 나올 유리의 사이다 대사는 71화에서 확인하기를.?

현실과 작품을 오가며 느끼는 윤리적 딜레마에 대한 공감

 

 <내 동생 건들면 너희는 다 죽은 목숨이다>에는 ‘푸른 별밤의 아스테리온’이란 소설 속 ‘아름답고 예의 바르고 인성도 곱고 머리까지 총명한 천재 만재’ 조연 캐릭터, 로잘리테로 빙의한 주인공이 등장한다. BL 소설인 ‘푸른 별밤의 아스테리온’은 로잘리테의 이복동생인 아스테리온이 어린 시절부터 기구한 운명에 시달리다가 20세에 안타까운 죽음을 맞는 내용이다. 기구한 운명을 맞는 건 아스테리온만이 아니다. 아스테리온이 죽으면 로잘리테의 인생도 16세로 리셋 된다. 이러한 탓에 반복되는 로잘리테의 삶에서 주인공은 회귀의 비밀을 알아내고 아스테리온을 무법천지에서 보호해야 하는 임무가 생겨버린다. 

 

로잘리테는 ‘좋은’ 캐릭터도, ‘나쁜’ 캐릭터도 아니다. 동생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아스테리온에게 접근하는 캐릭터들을 처단하는 모습은 ‘좋은’ 캐릭터 같지만, 인정 없이 잔인하게 처치하거나 조롱하는 대사와 행동에서는 ‘나쁜’ 면모가 보인다. 복잡한 캐릭터의 성격은 장르를 조망하는 메타 개그와 정신없는 속도감, 예상을 빗나가는 반전 개그로 뒤섞여 재미를 준다. 또 아스테리온에게 접근하는 캐릭터들을 성범죄자로 취급하는 로잘리테의 면모는 작품 밖에 존재하는 일부의 독자와 공감대를 형성한다. 장르의 관습을 인식하면서도 때때로 윤리적 관점에서 딜레마와 죄책감까지 느끼는 독자의 생각이 로잘리테가 말하는 “성범죄자”라는 대사로 표현될 때 깊이 공감하는 것이다. 
△ <내 동생 건들면 너희는 다 죽은 목숨이다> 4화 中
BL 작품 속으로 빙의한 주인공은 장르의 특성을 알면서도 자신의 동생을 괴롭히는 사촌 딜런을 성범죄자로 호명하고 그를 응징한다. ?

?


논리가 빈약해도 납득되는 주인공의 특혜

 <빙의자를 위한 특혜>는 대빙의 시대를 맞아 누구나 빙의할 수 있는 세계관 속에서 주인공이 죽기 전 가입한 생명보험의 덕으로 S급 빙의자가 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주인공은 소원대로 ‘생존 난이도가 낮’고 ‘꽃길, 돈길이 보장된 최고 장르’인 로판 육아물 속 아일렛 로델라인에 빙의했다. 예상과는 다르게 공작가의 영애가 아닌 공작가 사용인의 딸로 빙의한 주인공은 원작의 내용도 기억 못 하지만 S급 빙의자인 덕분에 이세계의 비밀을 알려주는 상태창과 신의 가호 등에 힘입어 어려움을 헤쳐간다. 

 

사실 원작의 아일렛은 신분과 나이상 약자에 속해서 다른 이들의 이익과 비교했을 때 평등하게 보호받고 증진되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배려(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씀)’가 필요하다. 그런데 주인공이 아일렛으로 빙의한 이상 배려는 필요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미 주인공이 ‘특혜(특별한 은혜나 혜택)’를 얻어 빙의해서다. 본래 로맨스판타지 주인공은 잘 알고 있는 세계에 빙의해서 이전 삶의 경험에서 쌓은 정보나 지식, 기술로 모든 사건을 빠르게 해결하는 특별한 존재로 공정함과는 거리가 멀다. <빙의자를 위한 특혜>의 주인공도 죽기 전에 구입한 ‘빙의생명보험 풀패키지’를 최초로 구입해서 이세계 치트키를 얻는데, 노력을 통한 정당한 보상도 아니고 사회적 배려를 통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주인공이 얻은 치트키는 ‘특’별한 ‘혜’택이며 그래서 아무리 어려운 사건도 원하는 대로 이뤄질 것이다. 그래도 독자는 읽는 순간만큼은 주인공의 욕망 위주로 흘러가는 이야기가 불공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인공의 특혜를 납득하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데, 이 특혜가 독자의 욕망과 일치하기에 나타나는 현상일 수 있다.? 

 

△ <빙의자를 위한 특혜> 1화 中
죽기 전 풀 패키지 생명보험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S급 빙의자의 특혜를 받게 된 주인공. 주인공은 이 특혜로 어떻게 세상을 구하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애쓸 것인가.?

뻔한 장르 규칙 속에서 현실의 문제를 대입하여 얻은 다시 쓰기의 재미
위에서 언급한 세 작품은 각각 여성이 주인공인 이야기에서 무엇이 중요한 가치인가를 논하고, 현실과 다른 세계인 작품에서 윤리적 죄책감을 느끼고 딜레마를 고민하며, 치트키의 특혜를 배려로 선회할 수 있는 아량을 생각하게 한다. 서로 다른 의제를 말하지만 맥락은 비슷하다.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갖고 어려워하는 문제들을 작품에서 다루는 것이다. 다루는 방식도 낯설면서도 비슷하다. 주목받지 못했던 악녀, 조연, 엑스트라의 입장을 빌려 그들의 사연을 통해 공감하고 이해하며, 직설적이면서도 위트있게 다양한 각도로 문제에 접근한다. 작품을 감상하며 느낀 해석의 지점이 각각의 작품에 반영되었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지향까지 제시한다. 
로맨스판타지 속 주인공은 빙의했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누구인지를 명확히 인지하며 빙의한 세계와의 거리를 인식하는 인물이다. 세계와 자신의 거리를 인식하는 주인공은 어떠한 지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줄 알 것이다. 연대하여 서로의 주체적인 삶을 북돋는 멜리사가 된 주인공과 멜리사에게 영향을 받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 수 있게 된 유리처럼 말이다. 각자도생이 아닌 서로를 도우며 살아남는 방식을 택한 멜리사와 유리를 지켜봤다면 우리의 세상에서 연대의 가능성과 삶의 주인이 되는 희망을 품게 될 것이다. 세상이 너무 급변해서 참고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는 독자는 로잘리테로 빙의한 주인공에게 깊게 공감할 것이다. 원작을 참고하는 것을 포기하고 적극적으로 새로 쓰기에 개입한 로잘리테가 겪는 문제들은 정신없는 개그에 묻혀 있지만 절대로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는 삶의 문제다. 아일렛 빙의자의 S급 특혜는 아일렛 가족만이 아니라 세계를 향한 배려로 확대될 것이다. 멜리사와 유리, 로잘리테와 아일렛이 각자가 빙의한 세계에 가져올 변화와 성장은 이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지만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로맨스판타지는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고 받는 참고가 될 것이다. 
로맨스판타지 장르는 뻔하다. 뻔한 것은 새로운 것 없이 반복되어 진부함을 줄 수 있다. 그러나 로맨스판타지는 뻔함을 반복해서 진부함만 늘어놓지는 않을 것이다. 로맨스판타지의 주인공이 원작을 이해하며 쓴 한 편의 패러디라는 것을 자각하는 이상, 패러디가 원작과 일정한 거리를 둔 반복인 이상 독자는 그들의 모험을 재밌다 할 것이고 재미 끝에 가리키는 무언가를 찾아낼 것이다. 그것이 감상의 지평까지 확장시키는 로맨스판타지의 재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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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칼럼의 후일담은 팟캐스트 ‘웹투니스타’의 파일럿 방송 <그 비평가가 로판에 고료를 탕진한 사연>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방송 들으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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