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사람’을 지켜라

 

왠지 2016년 여름이 떠올랐다. 2021년 4월, 일부 웹툰의 댓글란은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일부 커뮤니티에서 시작해 웹툰으로, 그게 다시 언론을 타고 ‘논란’이 되어 활활 타오르는 중이다. ‘성별 갈등’은 중요한 키워드지만, 그 갈등이 발현되는 양상은 꽤나 문제적이다.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으로서의 행위라기 보다, 화풀이에 가깝다고 읽히기 때문이다. 2016년이 떠오른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 ‘해명해’와 밈적 사고, 그리고 독자

 

2016년에는 익숙하지 않았던 개념이지만, 2021년에는 많은 사람들이 상황이 이렇게 된 원인이나 결과로 추정하는 것이 있다. 바로 밈적(Meme的) 사고다. 사고의 결과물인 밈으로 소통하는 사람들은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인터넷 커뮤니티나 콘텐츠로 제공되는 결과물이 사고를 구성하고, 그것으로 소통하는 과정에는 사유가 없다. 그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이해하는 ‘밈’이 의사소통을 구성하는 사고의 과정을 대체한다. 그렇기 때문에 맥락이 아니라 캡쳐된 ‘짤’ 한장이 소통을 만들어낸다고 착각하게 된다.

 

의사소통, 즉 커뮤니케이션은 상호적이어야 하는데, 밈 공동체 안에서는 소통이 방사형으로 이루어진다. 쌍방간의 결과물이 아니라 일방적 자극에 반응하는 것과 같다. ‘밈’이 먹힐 상황에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셈이다. 이런 ‘소통’이 이루어지는 공간, 즉 커뮤니티 안에서는 이런 식의 소통이 결속력을 높이고, 참여도를 높이는 행위가 된다. 네트워크 커뮤니케이션 이론 중 ‘동종애의 원칙(Homophily Principle)이다. 사회적 지위, 기호, 성향이 비슷할수록 친밀함을 느껴 긴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한다는 이론이다. 인터넷 커뮤니티 안에서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미셸 마페졸리는 “대중의 창조성 중 가장 완성된 형태는 현대 소집단들의 네트워크 구축”이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팬덤, 커뮤니티와 같은 온라인 ‘부족(部族)’이 소속감을 주고, 거기서 자아가 형성된다. 그런데, 문제는 커뮤니티의 성향과 세력이 강해지면서 그것이 유통되는 채널, 즉 콘텐츠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부족간 세력전의 형태로 받아들이고, 그 전장을 콘텐츠로 삼는 것이 문제다.

 

이 세력전은 ‘밈의 대결’ 이라는 결과물로 이어진다. 지난 수년간 남성 위주의 커뮤니티는 ‘밈’의 사용에 비판을 받아왔다. 그들이 사용하는 밈이 차별적이거나 혐오를 조장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때 비판은 사회적 맥락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은 실재하고, 그것이 가부장제라는 세계관으로 공고하게 작동하고 있는 한 여성혐오(Misogyny)는 여성을 억압하는 기재로 작동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밈은 사용을 지양해야 한다는 비판이었다.

 

하지만 남성 위주의 커뮤니티에선 이를 ‘부족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고, 여성 위주의 커뮤니티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문제삼기 시작했다. 아이돌 팬이 남긴 ‘주접 댓글’에서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오조오억’이라는 표현이나, 남자친구가 밥먹는 소리가 짜증난다며 남긴 의성어 ‘허버허버’ 등의 표현이 ‘남성혐오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남성혐오가 실재하는지, 그들이 주장하는 남성에 대한 차별이 혹시 페미니즘에서 이야기하는 맨박스(Manbox, 가부장제에서 ‘남자다움’을 강요하는 것)가 아닌지 따져보면 여성이 원인을 제공한 것은 찾기 어렵다.

 

‘남성들이 주로 받는 차별’이라면서 제기하는 군대 문제는 국가에 의해 이뤄지는 강제적 징병제도의 문제다. 댓글에서 시작해 군대 문제로 넘어오면, 이젠 댓글에 쓰인 단어는 중요하지 않고 이 문제가 주요 아젠다는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남성들의 고통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공격 대상이 이상하게 설정됐고, 그 과정도 이상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결국 ‘너는 군대 안가잖아’라며 여성을 공격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코에이 삼국지 게임에서도 징병제를 택하면 민심이 떨어지는데, 그때 징병제를 고른 주체는 게이머지 게임 속 여성들이 아니다. 이 과정에서 게이머는 ‘효율’을 증가시키기 위해 민심을 억제하는 방법을 연구한다. 국가도 같은 방식으로 사고하고, 그 화살이 여성에게 돌아가는 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공산이 크다. 하지만 여기서 맥락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극에 대응하는 반사적 행동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행동은 그 발화가 일어난 맥락, 사회적 합의 등과 완전히 무관하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밈’의 문제가 사회적 맥락 안에서 이해되지 않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그 부족 안에서 재창조한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 웹툰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단어 캡쳐해 해명 요구하기’는, 특정 자극을 적극적으로 찾아낸 사람들이 단어라는 ‘자극’에 반사적으로 ‘해명’과 ‘사과’를 요구하는 기이한,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자주 찾아볼 수 있었던 현상이다. 문제는 이들이 독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게 지금까지 웹툰과 관련 없는 얘기를 풀어낸 이유다.

 

독자(讀者)는 말 그대로 읽는 사람이다. 보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만화와 웹툰에서 독자는 작가가 창조한 세계의 맥락을 그림과 글자라는 기호로 읽어나가는 사람이다. 하지만 여기서 충돌이 일어난다. 밈적 사고는 맥락이 제거된 대화다. 작품이라는 맥락 안에서 구성요소를 해석하고 읽는 것이 아니라, 외부 커뮤니티의 필터로 짚어낸 ‘캡처’를 문제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당연히 독자가 아니다. 작품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 독자와 작가가 책임을 지는 시스템이 문제

  

‘바른연애길잡이’ 유료 댓글(좌), 무료 댓글(우)

 

다행히 웹툰에선, 작품을 진짜로 ‘읽는’사람과 아닌 사람을 구분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다. 바로 미리보기 시스템이다. <바른연애길잡이>의 무료 회차와 유료 회차의 댓글은 완전 다른 세상의 댓글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속되는 괴롭힘에 작가는 작품 수정과 휴재를 선택했다. 

 

이 과정에서 독자가 아닌 사람들이 만든 문제의 책임을 모두 지게 된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일부를 캡쳐해 ‘짤’로 만들고, 그 자극에 반응하도록 유도하며 해명을 요구하고, 마침내 작가가 견디다 못해 ‘해명’을 내놓으면 ‘해명했으니 문제가 맞다’는 식의 논리도 이해할 수 없지만,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그 책임은 작품을 앞으로도 볼 사람들이 져야 한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플랫폼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오히려 플랫폼은 이득을 볼 수 있다. 작품이 ‘논란’에 휘말렸으니 응원하기 위해 찾는 사람, 구경하기 위해 온 사람, 공격하기 위해 온 사람 모두가 트래픽이다. 트래픽은 곧 광고와 연결될 수 있고, 광고수익은 플랫폼의 이익이다. 사람이 모이는 규모가 곧 돈인 세상에서, 사람이 모이는 이슈는 플랫폼에게는 거의 언제나 이익이다. 그런데 이게 웹툰의 서사와 맥락을 소비하기 위한 독자들의 경험을 해친다면, 플랫폼이 나서야 하지 않나? 왜 플랫폼은 이 모든 시스템에서 이득만 얻고, 독자와 작가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도 취하지 않는가?

 

위의 유료와 무료 댓글 차이를 보듯, 독자들은 작품을 소비하고 무료 댓글의 독자들은 작품을 소비하지 않는다. 단순히 숫자가 많다고 해서 그들의 의견을 ‘의견’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내가 편한 대응은 문제 해결법이 아니다. 문제는 또 있다. 이 과정에서 언론 역시 트래픽을 얻기 위해 ‘논란’이라는 편한 말로 발생한 현상만을 전달한다. 현상은 맥락 안에서 만들어진다. 언론의 이름을 붙이고서 현상만 전달한다면, 그건 저널리즘이 아니다. 왜 항상 이런 문제에서 책임은 독자만 져야 하는가?

 

* 중년게이머 김실장과 콘텐츠 제공자의 자세

 

공교롭게도 이번 이슈는 웹툰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2016년의 일이 일러스트레이터와 웹툰 작가에게로 번진 것과 달리, 이번 사건은 유튜브 채널들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났다. 이전의 사건에선 비교할 수 있는 부분이 아주 적거나 없었지만, 이제는 있다. 그 중에 눈에 띄는 대응을 한 채널이 있다. 디스이즈게임에서 운영하는 ‘중년게이머 김실장’ 채널이다.

 

김실장 채널에서는 ‘오조 오천번’이라는 표현을 했다고 해명을 요구받았다. 김실장은 이에 먼저 영상을 수정하고, 세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번째는 무언가를 비난할 땐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해 달라고 요구하며, 비난을 한 사람에게도 리스크가 동반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비난이 사실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미 생긴 피해는 되돌리기 어렵다는 점을 들어 “제대로 된 근거”를 들어달라고 요구했다. 

 

두번째로는 영상을 수정한 것은 잘못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고 못 박았는데, 해당 표현이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콘텐츠와 무관한 내용’으로 가득차는 댓글창이 보기 싫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콘텐츠의 맥락과 관계없는 일 때문에 콘텐츠가 오염되는걸 막겠다는 자세다. 마지막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이 표현은 사용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대중에게 소비되는 콘텐츠가 기본적으로 누군가를 불편하게 해 소비층을 줄일 이유가 없다고 말하면서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대체할 수 있는 표현이 있다면 다수를 대상으로 콘텐츠를 창작하는 사람이 고려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웹툰들이 ‘수정’을 하는 이유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때문에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수정을 고려할 수 있고, 그 표현이 콘텐츠의 맥락을 해치지 않는다면 수정할 수 있다. 아니라면 편집부를 설득하고, 작품 내에서 이유를 보여주면 된다. 그러니 수정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사용한 이유에 대해 해명하라’는 요구다. 원래 세상에서 제일 힘든 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일이다. 이른바 부존재증명이다.

 

그러니 김실장의 이런 대응 이후에도 공격은 계속됐다. 김실장은 결국 2차 대응을 통해 “해당 영상을 삭제하고, 보다 콘텐츠를 보강한 영상을 올릴 것”이라고 공지했다. 콘텐츠 제공자의 책무가 있다면,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댓글란에서도 그 책임이 이어져야 한다는 취지의 내용을 추가로 적었다. 바로 “영상과 무관한 댓글이 상당수 존재해 이후 영상을 볼 분들이 불쾌하실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또한 “향후 채널의 방향성과 무관한 댓글은 삭제할 것”임을 공지했다. 결과적으로 김실장 채널에서는 더 이상 해당 논쟁이 보이지 않게 됐다. 콘텐츠를 지키기 위한 움직임이 구독자, 그러니까 영상을 진짜로 소비하는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은 셈이다.

 

* 독자와 플랫폼의 책임

 

김실장 채널은 중요한 지적을 했다. ‘비난을 하려면 근거 있는 비난을 하라’는 말과 ‘비난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메시지다. 당신들이 비난을 하려면, 당신들도 같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는 경고다. 그리고 실제로 그 이후에도 근거 없는 비난이 계속되자 김실장 채널은 차단을 선택했다. 이후에는 그런 공격을 찾아볼 수 없었다. “여기선 그러면 안 된다”는 룰이 생긴 셈이다.

 

김실장 채널은 콘텐츠 소비자를 지키기 위한 선택을 했다. 이번 웹툰 댓글 이슈도 이 흐름 안에서 논의해야 한다. 작품의 맥락 자체에 대한 지적이 아니라, 단어 캡쳐 하나로 시작된 문제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것이 문제냐 아니냐’는 바깥의 문제다. 최소한 작품을 읽고, 단어나 표현의 사용이 아니라 맥락 안에서 어떻게 읽히는지를 논의해야 한다. 그러려면 최소한 논의에 참여한 사람은 작품을 읽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작품’이라는 틀 안에서 그것의 사회적 맥락을,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니 작품의 맥락을 따지지 않고 한 부분을 캡쳐해서 가져왔다는 것 자체가 웹툰이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와 같다. 다시 한번 설명하자면, 애초에 <복학왕>에 제기된 문제는 앞뒤 맥락 상에서 상사가 ‘봉지은과 잤다’는 표현을 은유적으로 함으로써 완성됐다. 때문에 문제가 됐던 내용뿐 아니라 그 맥락 안에서 문제가 지적된 부분 역시 수정됐다. <헬퍼>의 경우 독자들이 그동안 망가진 ‘작품의 맥락’을 지적하는 대표적 사례로 일부분이 사용됐다. 그러나 이번엔 그런 과정이 없었다.

 

겉으로 보기엔 이 과정은 이용자의 항의 – 작품 수정 – 사과(해명)문 게시로 같은 과정을 거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내용상의 맥락을 제대로 짚지 않으면 문제의 원인은 놔둔 채 자극(항의)이 들어오면 조건반사하는 기계처럼 작동하는 해명 기계가 될 뿐이다. 동시대의 사회적 맥락에서 해명할 부분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과, 맥락을 따지면 의미없는 의성어에 항의하는 것이 같은 선상에서 처리될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 ‘기분나쁨’이 아니라 ‘독자’를 보호하라

 

이 모든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왜 남초 커뮤니티가 불씨를 당기면 더 빨리 ‘논란’이 되는지를 살펴보는 과정이다. ‘캡쳐’ 한 장으로 작가와 독자에게 책임을 지게 만드는 이런 문화를 ‘캔슬 컬처’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펴보면서 꾸준히 주장한 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소위 ‘논란’이 맥락이나 실재하는 혐오와 연동되는지 여부보다 ‘나의 기분이 나쁘다’는 자극에 반응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기분’은 공론장에 올라올 수 없어야 한다. 앞서 설명했듯 여성혐오와 그걸 바탕으로 한 언어를 포함한 밈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건 현실의 문제와 연동되어 혐오의 정서가 어떻게 전유(專有)되는지 논의하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성 위주의 커뮤니티에서 ‘기분 나쁨’을 이유로 맥락을 왜곡해 전달하는 건 왜 공론장에 들어올 수 있는가? 뿐만 아니라, 실제 독자가 아니라도 작품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이번 사례는 단순히 ‘네티즌의 총공격’이 아니라, 공론장에 남성들의 기분이 들어올 수 있다는, 이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 계기 중 하나다. 여성혐오로 인한 피해는 고용차별, 과중한 가사노동, 스토킹과 죽음으로 사회에 드러난다. 그런데, 이번 소위 ‘논란’이 기분나쁨 외에 어떤 사회적 차별과 혐오와 연결된다는 말인지, 김실장 채널의 말을 빌리자면 정확한 근거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독자를, 그러니까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한 정책은 장기적으로 작품을 읽는 사람들에게 안전망으로 작용한다. 작품을 소비함으로써 작가와 독자가 보호받고, 그 안에서 나와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커뮤니티가 형성된다면 그건 댓글의 순기능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무분별하게 방치된다면, 그리고 그 이득은 플랫폼이 챙기고 책임은 플랫폼의 주요 수입원인 작품을 만들고, 읽고, 애정하는 작가와 독자가 지게 된다면 질문을 바꿀 수밖에 없다. 플랫폼에게 독자는 트래픽 이상의 의미가 없느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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