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DIE-SIGHT] “정리의 밤” ? 관계를 정리해야 하는 우리들에게

 

 

불키드는 음악과 만화 두가지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다. 2016년 이전까지는 ‘노키드’라는 필명으로 활동했고, 레진코믹스 등에서 단편을 연재했다. 그러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육아와 연재를 병행할 수 없어 연재를 쉬었다. 그리고 2017년에는 ‘불키드’로 필명을 변경했다. ‘더 이상 아이가 아니다’라는 뜻으로 지었던 필명 ‘노키드’가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사회적으로 의미가 바뀌어버린 ‘노키드’라는 필명 대신 아니 불(不)자를 써서 불키드로 필명을 바꿨다.

 

그리고 필명을 바꾼 2017년,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작품활동을 재개하기 시작했다. 2019년에는 아예 독립만화 전문 출판사인 ‘삐약삐약북스’를 세우고, 군산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다. 원래 로드무비 스타일의 작품으로 기획했던 <정리의 밤>은 삐약삐약북스의 첫번째 책이다. 

 

이 작품은 주인공 해은이 렌터카를 타고 전국을 돌며 친구들에게 가지고 있던 물건을 나눠주면서 그들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10대부터 20대까지를 함께 했던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나면서 그들과 만나지 않은 세월동안 어긋나버린 서로의 입장과 가치관, 또는 여전히 그대로인 사람에게 아직 하지 못했던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한 모습을 그린다.

 

작가는 후기에서 <정리의 밤>을 최초의 기획을 뒤엎고 다시 그렸다고 했다. 후기에서는 최초의 작품은 로드무비 스타일이었고, 그러다 보니 30대에 접어든 주인공들이 20대의 고민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삶은 우리를 그렇게 놔두지 않는다. 주인공 해은이 친구들을 만나러 전국을 순회하게 된 것도 단순히 이사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30대가 된 해은은 직장의 부당한 대우에 항의했다가 부산으로 전근을 가게 됐고, 그래서 예전 친구들을 모아 버리기엔 애매한, 하지만 가지고 있기엔 부담스러운 물건들을 나눠주려고 여행을 떠난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정리의 밤>은 사람과의 관계도 유지하기엔 애매하고, 떨쳐내기엔 부담스러운 관계가 생겨나는 시기를 그리는 작품이다. 시간은 두텁지만 나와 너무나 다른 궤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애매한 관계를 그리고 있다. 불키드 작가가 흑백으로 그려낸 작품 속 계절은 겨울이다. 무언가를 버리고, 새로운 봄을 기다리는 시기. 우리가 모르는 새에 찾아오는 관계의 겨울을 그린다. 

 

불키드 작가는 작품 속에서 “살아남은 기분이 든다는 건, 누군가는 사라졌다는 것. 사라져버린 많은 여자 동기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라고 말한다. 정리해야 하는 많은 것들 중, 30대가 된 여성 직장인에게 우리 사회는 여전히 결혼-출산을 한 세트로 생각하도록 강요하고, 결혼과 출산 이후 직장과 육아를 선택하기를 요구한다. 그렇게 살아남은 해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깥으로, 바깥으로 밀려난다. 30대 여성 주인공을 내세운 작품을 그리면서, 작가는 이 지점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비록 작품 속에선 소위 ‘잘 풀린’ 경우가 등장하지만, 잘 풀리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로드무비 스타일을 염두에 두었던 최초의 기획을 뒤엎고 <정리의 밤>을 다시 그리는 동안, 아내인 불친 작가가 생계를 책임졌다. 어쩌면 이 경험이 불키드 작가가 이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던 동력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자신의 삶이 바뀌는 경험, 그리고 이후에 프리랜서로 생활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했던 시간, 그리고 삐약삐약북스를 설립하고 또다시 바뀐 삶에 대한 시선이 고스란히 담을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당사자로서, 또는 당사자를 바로 곁에서 지켜보면서 느꼈던 감정들을 ‘정리’해낸 작품에 박수를 보낸다. 아무리 가깝더라도, 당사자의 경험과 비당사자의 경험은 지구와 달 만큼의 거리가 있다. 우주적 관점에선 가깝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선 지켜볼 수는 있어도 직접 갈 수는 없는 거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키드 작가는 이 경험을 해은의 시선으로 녹여냈다. 물론 작품의 마지막이 지나치게 낙관적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만화 작품이 인생처럼 씁쓸하기만 하면 무슨 맛이겠는가.

 

작품을 읽으면서 함께 들으면 좋을, 불키드 작가가 활동하는 밴드 ‘꽃과벌’의 음악은 유튜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도깨비불>, <방과후>, <나무들처럼>이 공개되어 있다. 2020년에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를 섬세하게 짚어내는 작품인 <정리의 밤>은 사이드비(www.sideb.kr) 등 독립서점에서 구매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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