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이리 나쁜 친구일까 한상정 교수 – 앙꼬 작가의 ‘나쁜 친구’ 앙굴렘국제만화축제 ‘새로운 발견상’ 수상 기념

한국만화 최초로 앙꼬 작가님의 ‘나쁜 친구’가 앙굴렘국제만화축제에서 ‘새로운 발견상(Prix revelation)’을 수상하였습니다. 수상을 기념하여 웹툰인사이트에서는 수상 작품인 ‘나쁜 친구’에 대한 특집을 준비하였습니다. 

[ 관련 소식 “한국만화 최초 앙꼬 작가의 ‘나쁜친구’ 제44회 앙굴렘국제만화축제 ‘새로운 발견상’ 수상” ] 

 

 

비평을 작성하여 주신 인천대학교, 만화연구자인 한상정 교수는 글과 함께 “언제나, 누군가는 작가님의 책을 읽으며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수상을 축하드립니다”라 축하의 말을 전하였습니다. 

 

 

우리는 왜 이리 나쁜 친구일까 – 앙꼬의 <나쁜 친구>, 창비? 

한상정

 

고등학교 1학년인 즈음이었다. 학교는 시내 한가운데 있었고, 당시 담임선생님은 막 부임한 젊은 영어선생님이었다. 항상 알루미늄으로 된 분필케이스에 분필을 넣어 손에 분필가루가 묻지 않도록 하며 칠판에 영어문법들을 적어나갔다. 비록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지만. 인상이 굉장히 좋아서 마음속으로 동경했었다. 이 마음이 사라진 것은 특정사건 떄문이다. 키가 작은 편이고 열심히 공부하는, 오늘날 보면 ‘범생이’였던 필자는 거의 앞줄에 앉아 수업에 집중했었다. 언제나 교실 뒤쪽에 앉아서 놀고 있는 이른바 ‘날나리’들이 왠지 멋지고 자유롭게 보였지만 접촉할 기회는 별로 없었다. 그들은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내놓은’ 아이들이었고, 심심하면 학생주임에게 불려가서 혼나고 왔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들 중의 하나가 큰 사고를 쳤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떤 ‘큰’ 사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우연히 그 아이가 아무도 없는 교실창가에서 남몰래 눈물을 훔치는 장면을 목격했다. 왠지 알 수 없는 억울함 같은 것이 치밀어 올랐는데, 그 당시엔 그것이 무엇인지 이름붙이지 못했다. 담임 선생님은 학생들 앞에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고, 결코 그 아이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집에서 내놓은 아이들은 학교에서도 당연하게 버려졌다. 그 친구는 정학을 당했고, 머지않아 교실에서 사라졌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입시준비를 하는 고등학교 교실에서 오랫동안 이슈가 되진 않았다. 집에서 쫓겨나면 학교에서도 쫓겨나야 하는가? 학교야말로 그들을 품어야 하는 곳이 아닌가? 담배를 핀다고, 외박을 했다고 학교에서조차 쫓겨나야 하는가? 이들이 학업분위기를 망치고 주변 학생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기에? 대학입시 이외의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학교에 무엇을 바랄 수 있을 것인가. 학교라는 제도가 학생들에게 가하는 무형의 폭력에 대한 분노, 그래, 그때 이름붙이지 못했던 감정이 이것이었구나.   

 본의건 아니건 집에서 쫓겨나고, 학교에서도 쫓겨 어린나이에 길거리에 내동댕이쳐진 그 많은 ‘날나리’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자세히 알고 싶지 않다. 추측은 가능하지만 눈 돌리고 싶다. 친한 친구들도 아니었고, 그냥 다른 세계에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려니 여기고 싶다. ‘신’ 정도는 되어야 이들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신이 어디에 있으며, 있다한들 이들을 어떻게 구하겠는가. 사회안전망의 사각지대에 살아가는 이들을 사회안전망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현실적인 노력만이 되풀이되고 증폭되는 폭력들을 이길 수 있을 뿐이다.   

 앙꼬의 <나쁜 친구>는 그 시절의 폭력들을 그대로 보여준다. 아니, 그 폭력성은 지금도 여전히 남아있으며, 어쩌면 더욱 깊어지고 넓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소외지역, 파괴된 가정, 부모가 자식을 지켜줄 수 없는 곳에 어린 소녀와 소년들이 살아가고 있다. 작가의 가정은 그러지 않았음에도 왜 그곳에 있었을까. 그녀는 “언제나 우리 가족의 화목함과 부유함이 부끄러웠다(89)”고 하면서도 그 자리에 있었다. 정애 때문일까? 어른들이 하는 말대로, 나쁜 친구를 만나서 나쁜 무리들에 빠진 걸까. 어떤 일이 있어서 둘이 친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작가는 부끄러워 할 줄 알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알 수 없는 일들>, <정애>, 그리고 <정애와 나>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과거에서 현재로 흐르고 있지만, 중간 중간에 현재의 작가가 설명을 하기 위해 끼어든다. <알 수 없는 일들>은 중학교 때 자신이 줄곧 매를 맞았다는 것과, 그 가운데에 친구 정애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녀와 함께 가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묘사되고 있다. <정애>에 들어오면, 그 때야 정애를 둘러싼 환경이 어떠한지를 알려주며, 정애는 작가에게 또 같이 가출하자고 말하지 않고 혼자 가출한다. 그 후 작가는 고등학교에 가서도 양아치처럼 살기를 선택했고, 문제는 그 행동들의 결과들마저 선택할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들은 충분히 참혹했다. <정애와 나>는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돌이켜본다. 어떻게 그녀가 그 곳에서 나올 수 있었는지 정확하게 설명하지는 않지만, 그 곳에서 나왔기에 안심하고 있다. 어느 날, 여전히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정애를 우연히 마주치자마자 그녀를 피한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참담하고 부끄럽다. 작가는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다. 심지어 자신이 나쁜 친구라는 것마저도. 그래서 우리도 부끄러운지도 모른다. 나쁜 친구는 작가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이다. 돌아보면, 우리는 언젠가는 누군가의 나쁜 친구였을 것이다. 나쁜 길로 끌어들여서 나쁜 친구인 것이 아니라, 받았던 배려를 돌려주지 않았던 것이, 버려진 친구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 또는 잡았던 손을 쉽사리 놓아버렸던 것이 나쁜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누가 이를 나쁘다고 쉽게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끔찍함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 도망가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어떻게 그런 곳에서 스스로 머무르려고 하겠는가, 떠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면.   

 보통, 만화책을 읽을 때 오리지널 원고를 보고 싶다는 생각은 거의 들지 않는다. 원고 자체는 만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쇄되었거나 웹상에 게시된 상태가 만화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원본이 보고 싶다. 왜냐하면, 인쇄상태가 원고를 100% 발현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쇄전문가가 아니라서 정확하진 않지만, 눈이 갑갑한 것이 왠지 한 꺼풀 벗겨보고 싶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지금의 상태로 접해도 생생한 펜선들이 작품의 느낌을 잘 전달하고 있지만, 더 칼날같은 선들이 숨어있는 느낌이다. 전체 페이지들을 통틀어서 이 작품에는 어떤 스크린톤이나 사진 복제물들을 활용한 곳이 없다. 동일한 장소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더라도 모두 작가가 다시 그렸다. 후기에서 등장하는 작업하는 동안 두 친구가 잉크와 펜촉을 사줬기에 너무 고맙다는 말이 실감난다. 자를 댄 듯한 반듯한 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친근하고 울퉁분퉁한 선들은 작가의 글씨체와 어울러져 그 어두웠던 밤과 ‘냄새’마저도(그림1)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 그림1. 페이지 37 ]

 

 

 

[ 그림2. 페이지 16 ]

 

 

 밤과 새벽의 싸늘한 냉기와 냄새. 맞아서 튀는 피. 이런 것들을 모두 흑백의 그림체로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그녀를 밝혀주는 거라곤 저 멀리 떠있는 희미한 밤달 뿐일까. 원근법과 상관없이 배치된 배경의 건물들은 마치 이차원적인 종이로 만들어져 겹겹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것 같다. 배경은 다양한 농도의 흑백 그러데이션을 활용하여 부드럽게 시선에 포착된다. 인체 표현 또한 독자들이 가장 자주 발견하는 코드화된 인물의 얼굴과 모습이 아니ㅣ다. 얼굴은 상당히 평면적이지만 인물마다 구별 포인트를 가지고 있고, 종종 등장하는 만화적인 표현들이(그림 2의 칸1과 칸2에서 폭력을 구사하는 부분)이 이 작품이 만화라는 것을 알려준다. 화장실 벽과 바닥, 화장실 문과 벽, 창문, 그 밑에 꿇어앉아있는 아이들의 모습과 그와 대조되는 선배들의 어깨에 힘이 꽉 들어간 모습은, 비록 이것이 만화체임에도 불구하고 현실감을 충분히 증폭시켜준다.

 

[ 그림3. 76,77 페이지 ]

 

 

[ 그림4. 160, 161 페이지 ]

 

 

 그림3의 양면페이지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오버랩 되고 있다. 가출하고 돌아온 그녀들에게 선생들의 체벌은 혹독하다. 생각해보면 이해가 안 되는 일이기도 하다. 왜 가출했다고 학교선생들에게 맞아야 했던 걸까. 가정환경 때문에, 또는 다른 이유 때문에 가출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의 선택의 문제가 아닐까, 아무리 미성년자라고 할지라도. 미성년자이기에 선택의 자율권이 없다고 최대한 양보하더라고, 최소한 그것은 체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체벌이 그 미성년자의 상황을 더 낫게 만들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가끔 더 이상 맞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안심할 때가 있다’고 하면서도, ‘사람은 맞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이제는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른 것을 이해한다. 그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말이다. 애정의 이름으로 폭력을 가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버지의 폭력을 다른 이들, 친척들이나 선생들의 폭력과는 구분 짓고 있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라도 정애에게 있었다면, 정애가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른쪽 페이지의 첫 번째 칸은, 그녀의 독백과 더불어 안정감을 부여한다. 사방이 어두워도 그녀가 만화를 그리고 있는 곳만은 환하다. 책상도 책상서랍도 그 옆의 책꽂이도 모두 그녀의 펜선이 새겨져있어서 무언가 가득 빼곡이 찬 느낌이다. 오랫동안 칸들과 그림들을 들여다보아도 전혀 피곤하지 않다.

 

 그림4의 양면페이지는, 작가가 스스로를 ‘나쁜 친구’라고 또다시 자인하게 되는 사건이다. 언제나 정애소식을 궁금해 했고, 그러면서도 어디 있는지 막연하게 추정했지만 막상 그녀를 우연히 마주친 순간, 작가는 그녀를 외면한다. 서있는 사람들 틈에 정애의 얼굴이 조그맣게 드러난 순간부터(왼쪽 페이지 세 번째 칸) 얼굴을 분명히 확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순간(오른쪽 페이지 첫 번째 칸)에 도달하자 작가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을 감춘다. 동일한 두 개의 칸은 환하게 클로즈업된 정애의 얼굴과, 어둠속으로 자신의 밝은 얼굴을 숨기려는 작가의 모습으로 대조된다. 즐겁게 떠올릴 수 있는 기억만 남기고, 견디기 힘들었던 일들은 모두 기억에서 삭제했던 그녀에게 정애의 모습은 남아있는 과거로 그녀를 덮친다.

 

[ 그림5 174~175 페이지 ]

 

 

[ 그림6. 표지 ]

 

 

 그림5의 왼쪽 페이지는 왜 작가가 정애가 떠난 후에도 그 끔찍한 곳에 제 발로 들어섰는지를 추정하게 만들어주는 에피소드의 끝부분이다. 함께 가출한 후 단란주점 생활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는 그녀를 두고, 정애는 혼자 돈을 벌어오겠다며 나간다. 여관방에서 새벽 5시경이 되면 돈을 많이 벌어 오겠다며 나가는 정애를 웃으며 배웅한다. 막상 문이 닫히고 나면, 그녀는 고개를 숙인다. 울고 있었을까.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까. 스스로 나쁜 친구라고 생각했을까. 그래서 정애가 두 번째 가출을 하며 자신을 데려가지 않았다고 생각했을까. 그래서, 같이 지냈던 여관을 지나가며 정애가 무언가 머뭇거렸던 것을 오랫동안 기억하는 것일까. 그 다음날에 정애가 사라졌으므로. 중학교 때 정애네 집에서 만났던 그 수많은 친구들이 그곳을 빠져나오기 힘들었던 것이라면, 그녀는 그런 환경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그 곳에 제 발로 걸어갔던 것은, 그런 자신에 대한 체벌이었을까. 그때의 모습이 오늘에도 또다시 오버랩 된다. 왼쪽 페이지에서 그녀가 있는 곳만 잠깐 환한 것처럼, 오른쪽 페이지에서도 그녀가 있는 곳만 환하다. 정애가 떠난 곳은 모두 깊은 어두움에 쌓여있다. 정애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 저 깊은 어둠속으로 걸어갈 용기가 작가에겐 없다. 그래서 우리는 나쁜 친구일 뿐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그림6의 표지로 선택된 그림은 함축적이다. 양면페이지 전체의 어두움에서 오른쪽을 차지하고 있는 두 친구는 그대로 밝은 톤으로 묘사되어있다. 이들을 둘러싼 어두움에 유일한 빛은 아마 둘의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친구를 저버린 스스로가 나쁜 친구라는 작가의 고백은 그녀의 것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의 비겁한 안심, 폭력에 무한정으로 노출된 신체들이 있는 곳과는 멀리 떨어져있다는 안심은 부끄럽기 그지없다. 한 인간으로서의 부끄러움. 앙꼬는 그 부끄러움을 파헤쳐서 드러낸다. 부끄러운 줄 알면, 무언가를 해야겠지. 그래서 앙꼬는 그렇게 열심히 칸들을 펜과 잉크로 오랫동안 헤집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본 내용의 원출처는 ‘황해문화’ 2012년 12월호를 통해 공개되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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