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 전 해적판, 2000년대에 다시 내도 저작권 위반 아니라는 대법원

 

 

 

지금은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많이 나아졌지만, 이전에는 더 심각했습니다. 베른 협약 가입 이전에는 정식판이 아니라 해적판이 공공연하게 유통되기도 했습니다. 베른협약은 1886년 영국, 프랑스 등이 중심으로 체결한 협약으로 국제 저작권 보호 증진을 위한 최초의 조약입니다. 아무튼, 이 전에 무단으로 유통되어 팔리던 책 중에는 일본의 역사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무단으로 번역한 해적판 <대망>이 있습니다.

 

1975년 처음으로 번역된 이 책은 동서문화사(현 동서문화동판)에서 출간됐는데, 야마오카 소하치의 역사소설을 번역해 제목을 고쳐 출간한 책입니다. 당시에 원작 작가인 야마오카 소하치의 허락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묘한 시대죠. 그리고 문제는 이후에 우리나라는 1996년에 베른협약에 가입하면서 생깁니다.

 

 

결국 해적판에 대해선 법이 없던 시절이니 완전히 새로운 번역 등 ‘새 저작물’이 아니면 괜찮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여기에 과거 무단저작물을 원작으로 삼아 번역, 각색등을 거친 ‘2차적 저작물’의 권리는 인정하게 됩니다. 이렇게 안 하고 이전까지 모두 적용을 시켜버리면 저작권 소송이 쏟아지게 될테니,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법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해는 어렵지만.

 

아무튼, 2005년에 동서문화사는 <대망>을 재발간합니다. 문제는 1999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솔 출판사에서 정식으로 출간했다는 겁니다. 현행법에서는 외국 책을 번역해 출간하려면 원작자, 또는 한국어판 발행권자인 다른 출판사의 허락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원작자는 75년판을 허락했다고 하고, 현재 권리자는 99년에 책을 냈고, 해적판을 다시 낸 쪽에서는 ‘맞춤법, 오역 등만 수정했지 같은 책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결국, 재판에서 해결을 보게 됩니다.

 

1,2심은 모두 동서문화사가 낸 1975년 <대망> 1권과 2005년 <대망> 1권이 다른 저작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니까 2005년판 출간이 적법하지 않다고 보고, 출판인 겸 작가인 동서문화동판의 고정일씨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1년, 벌금 1천만원을 선고했습니다. 1심에서는 “2005년판은 1975년판에는 없던 표현을 추가하고 새로운 표현으로 번역해 과거본과 동일성을 상실했다고 봤고, 2심도 같은 취지로 판단했습니다. 다만, 2심에서는 “예기치 않게 개정 저작권법이 시행되 피해를 입은 측면이 있다”면서 벌금 700만원으로 감형됐습니다.

 

당시 동서문화동판의 대표는 “2005년판은 1975년판 대망의 내용을 일부 수정한 결과물로 실질적으로 동일한 저작물”이라면서 “2005년판 대망은 구 저작권법 발효 시점 이전에 이미 작성을 완료했고, 2004년 이후 작업은 최종 교정작업”이라고 항소를 제기했었습니다.

 

그리고, 대법원까지 가서 이게 뒤집어진 거죠. 대법원은 “1975년판의 문체, 어투 등에서 (원전과 다른) 창작적 표현들이 2005년판 <대망 1권>에도 상당 부분 포함돼 있다”며 “사회통념상 새로운 저작물로 볼 정도에 이르렀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밝혔습니다. 대법원에서는 법리적인 판단만을 하는데, 1,2심의 법리적 판단이 틀렸다고 본 겁니다.

 

결국 해적판 <대망>이 재출간할 수 있게 된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1975년판은 ‘습니다’가 아닌 ‘읍니다’로 표기하는 등 이젠 어른들도 잘 기억나지 않는 옛날 말로 되어 있었으나, 2005년판은 이걸 수정하고, 지명이나 외국어 표기법, 한자 발음 등 일부 표현에도 손을 댔는데 이정도 고친걸로는 ‘사회 통념상 새로운 저작물로 보기 어렵다’고 본 거죠. 대법원은 “2차적 저작물의 이용행위에 포함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애초에 1996년 당시 “지금 찍어낸 판형과 똑같은” 것만 인정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데, 대법원 판단이라 파장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레트로’가 유행이라지만, 상식적인 판단을 기대하는게 어려운 일이었을지 의문입니다.

 

유독 저작권 침해에 관대한 ‘리걸 마인드’가 바뀌고 있다곤 하지만, 디지털 콘텐츠로 시장이 바뀐 상황에서 어떻게 작동할지 불안한 것도 사실입니다. 한편,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20 웹툰작가 실태조사에서는 절반이 넘는 작가들이 저작권 침해에 대해 ‘처벌 강화’와 ‘적절한 피해 보상’을 주문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내년에는 저작권법 개정이 본격적으로 논의될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법원의 시선도 변화가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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