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계 협회들이 모여 만든 첫 ‘통합 표준계약서’ 씹뜯맛즐

 

  

만화계에서 표준계약서는 꽤 오래된 얘기다. 2014년 첫 선을 보인 표준계약서는 ‘아직 부족하다’는 채찍질을 받으며 지속적으로 개정작업을 거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디지털 상황에서 각자 다른 계약요건을 최대한 보장하면서 동시에 작가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하려다 보니 생겨나는 문제에 가깝다. 달리 말하면 계약서에 원칙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다 보니 그대로 적용되기 어렵다는 말이다.

당연히 계약은 쌍방의 합의가 가장 우선시된다. 그래서 쌍방이 동의해서 일단 서명한 계약서는 명백한 불법이 아닌 이상, 쌍방의 합의 없이 변경하기는 굉장히 어렵다. 지난 2018년 공정거래위원회가 26개 플랫폼의 계약서를 전수조사한 것 역시 계약서가 지정하는 범위 외에 한쪽에 지나치게 유리하거나 불리하게 적용된 계약 내용에 대해 시정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신인 작가들에게 계약서 검토를 받고, 수정요구를 하고, 수정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되도록 계약을 삼가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명은 쌍방간의 합의이기 때문이다.

플랫폼의 크기가 커지고, 특히 플랫폼이 ‘데뷔’, ‘연재’라는 목줄을 잡고 있는 경우에 힘의 차이를 실감할 수밖에 없는 작가는, 불공정한 걸 알더라도 서명할 수밖에 없다. 특히 정보가 적은 신인 작가의 경우에는 어떤 계약 내용이 불합리하고, 내가 어떤 계약 내용이 유리한지, 내가 어느정도 위치에 있는지 정보를 알기가 힘들다. 이런 환경에서 표준계약서는 어떤 계약 내용이 ‘이상한지’고 알 수 있는 최소한이 되기도 한다.

 

*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구구절절 빌드업을 했나

이렇게 말이 길었던 이유는, 출판게에서 낸 표준계약서를 이야기하기 위한 빌드업이다. 출판계 협단체 10개 단체가 모여 만든 ‘출판저작권법 선진화 추진위원회’는 대한출판문화협회, 학습자료협회, 한국검인정교과서협회, 한국과학기술출판협회, 한국기독교출판협회, 한국아동출판협회, 한국전자출판협회, 한국중소출판협회, 한국출판인회의, 한국학술출판협회가 모여 만든 단체다. 이 단체에서는 지난 1월 15일, 무려 출판계 최초로 ‘통합 표준계약서’를 만들었다고 발표했다.

출판사와 저작권자가 맺는 계약서를 기존 4종에서 1종으로 통합하고, ‘표준계약서’ 답게 업계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고 (출판사의 입장에서) 믿는 내용이 들어가 있는 계약서다. 근데 이 계약서가 2021년을 사는 우리의 입장에서 보기엔 어딘가 좀 이상하다. 특히 ‘콘텐츠’로 판을 넓혀서 봤을 땐 시대착오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 있었다.

 

* 출판계 ‘표준’ 계약서, 어떤 부분들을 강조했나?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발행한 보도자료에는 크게 다섯가지 부분을 강조했다. 1) 그간 4종(출판권 설정, 전자출판용 배타적 발행권 설정, 출판권 및 전자출판용 배타적 발행권 설정, 출판권 및 배타적 발행권 설정과 기타 저작권 사용계약서)로 나뉜 것을 하나로 묶었다. 2) 저작권자의 계약 해지 요구 권리를 명시했다. 3) ‘2차적 저작물’과 ‘부차적 사용’을 명확하게 구분했다. 4) 출판권과 배타적 발행권의 유효기간을 조정했다. 5) 전자책, 오디오북과 관련된 조항을 정비했다.

 

먼저 ‘계약서 통합’ 부분부터 살펴보면, 4종의 계약서가 별지로 작성되어 있었던 것을 하나로 묶고, 그 중에서 선택해 계약할 수 있게 만들겠다는 말로 ‘사용자의 편리성을 도모했다’고 설명했다. 물론 출판권 설정, 전자출판용 배타적 발행권, 출판권 및 전자출판용 배타적 발행권 설정은 하나로 묶을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건 ‘기타 저작권 사용계약서’다. 웹툰계에선 2차적 저작물 이용을 되도록 분리하도록 유도해왔다. IP의 가치를 아직 모르는 상태에서 일단 계약부터 하기보다, IP의 활용가치를 높일 수 있는 쪽으로 작가가 직접 선택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이 계약이 얼마나 양 계약 당사자 모두에게 ‘편리한’ 방식으로 작동할지 명확히 알기는 어렵다.

두번째로 저작권자의 ‘계약 해지 요구 권리’ 조항을 추가하며 출판문화협회에선 ‘출판권자가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저작권자가 계약 해지를 요구할 수 있도록 명시하여 저작권자의 권리를 보호하고자 하였다.’고 설명했다. 세번째는 책을 다른 매체로 옮기는 것을 ‘2차적 저작물’로, 책을 다른 형태의 책(문고본, 큰활자본 등)으로 만드는 것을 ‘부차적 사용’으로 정의한 내용이다. 전자는 없었다면 이상하고, 후자는 용어의 혼동을 막기 위한 조치로 둘 다 환영할 만한 일이다. 물론, 이 내용은 모두 문체부에서 발행한 출판분야 표준계약서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이다.

 

문체부가 발행한 표준계약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쌍방에 책임을 두는 계약해지(위), 오디오북 등을 설명한 각주 내용(아래)

 

다섯번째 전자책과 오디오북의 발행에 대한 저작권료 산정과 저작권 사용료 특례 조항을 만든 것이다.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 맞춰 책을 다양한 형태로 만들겠다는 포부가 엿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출판’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계약서에 전혀 유통방식이나 소비 방식이 다른 디지털 매체를 책의 연장선으로 보겠다는 것은 아직까진 논란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 진짜 문제는 네번째 ‘유효기간 조정’

먼저 네번째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해당 조항이 다루고 있는 ‘출판권과 배타적 발행’에 대해서 알아보자. 배타적 발행은 계약 당사자가 해당 출판물(저작물)을 독점적으로 발행할 수 있는 권리로, A 출판사에서 계약한 책은 계약기간동안 A출판사에서만 발행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의미다.

 

문체부가 발행한 웹툰(좌), 출판(우)? 표준계약서에서 공란으로 표기된 계약기간 

 

앞서 이야기한대로 계약은 ‘당사자간 쌍방 합의’가 중요하기 때문에, 웹툰 분야의 표준계약서에서는 해당 배타적 전송권 기간을 쌍방 합의에 의해 정할 수 있도록 공란으로 두고 있다. 통상적으로 업계에서 사용되는 기간이 있다 하더라도, 쌍방에 의한 합의가 우선하기 때문이다. 웹툰 분야에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기간은 2~3년으로 알려져 있다. 당연히, 문체부에서 제안한 출판계 표준계약서에도 이 부분은 공란으로 처리되어 있다.

그런데, 출판계에서 낸 ‘표준’ 계약서에서는 출판권과 배타적 발행권 유효기간을 ‘10년’으로 조정했다고 밝혔다. 출협이 밝힌 이유를 보면 “출판산업적 측면에서 콘텐츠의 다양한 기획 및 안정적 투자를 통해 출판사가 투입한 비용을 회수하고 지속적인 출판이 이루어지고 저작자도 안정된 수익을 수취할 수 있도록 계약기간을 10년으로 조정”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미 계약을 할 때 선택했다고 하더라도 10년치가 저당잡히는 상황을 ‘표준’으로 놓고 계약서를 만든 셈이다. 출판사에 일방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는 조항이고, 작가 입장에선 10년간 계약 갱신을 요구하기 어려운 조항이기도 하다. 쌍방간 합의의 영역에 있는 것을 묶는 계약은 일방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다.

 

* ‘표준계약서’가 가지는 의미

이런 내용을 보고 나면, 다시 표준계약서의 의미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표준계약서에 아쉬움을 가지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한 쪽의 권리를 제한하지 않으면서, 지켜지지 않았을 때 한쪽에 압도적으로 유리하거나 불리한 내용을 할 수 없도록 하는, 말 그대로 ‘표준(Standard)’이 되는 계약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기에 나와있는 내용을 알아봄으로써 어떤 것이 합의로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이고, 어떤 부분에 쌍방의 책임이 있어야 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크다.

실제로 웹툰계 표준계약서가 나온 이후에 여러 불만들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약서 수정은 권리’라는 목소리와 권리와 플랫폼의 책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동안 표준계약서는 문체부와 업계가 논의해 만들어져 왔다. 출판계에도 그렇게 만들어진 계약서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데, 출판계에서 직접 내 놓은 계약서는 ‘출판사의 입장’은 있지만 계약 당사자의 한 축인 작가의 입장이 빠져 있다.

 


이 ‘표준계약서’의 목적은 출판물의 발행인데, 8조에는 버젓이 별지로 분리해야 할 2차적 저작물 작성권의 세부 내용까지 포함된다.

 

단순히 입장만 빠진 게 아니라, 권리도 축소됐다. 출판계가 주장한 내용 외에도 문제로 지적 받고 있는 부분만 따져봐도 출판에 필요한 자료수집과 도표 등의 제작, 비용 등을 모두 작가에게 떠넘기고, 출판사는 무한 수정요청 권한을 갖는 제 7조 1항이 대표적이다. 또한 별지분리를 원칙으로 해야 하는 2차적 저작물 관련 내용을 8조에 포함시켰다는 점, 그 권한을 출판사에 일방적으로 위임하도록 했다는 점도 문제가 있는 조항으로 꼽힌다. 이 계약서를 ‘표준’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2조에서 설정한 ‘계약의 목적’을 아득히 뛰어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는지 궁금하다.

때문에 콘텐츠를 다루는 입장에서, 우려되는 부분이 많다. 특히 출판계가 지속적으로 웹소설과 웹툰을 출판계라는 틀 안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도서정가제 등의 이슈가 상존하는 한, ‘배타적 발행권 10년’ 조항을 ‘표준’ 이라고 발표한 것은 그동안 자정작용을 통해 업계의 계약 환경을 평등하게 맞추고자 했던 노력을 거꾸로 되돌리는 시도라고 볼 수밖에 없다. 

 

윤철호 출협 회장은 15일 출판계 통합 표준계약서 발표식에서 김학원 한국출판인회의 회장은 “시대에 조응하고 출판의 영역을 확장하는 이번 표준계약서가 잘 정착되도록 모두가 힘을 모으자”고 말했다. 시대에 조응하는 콘텐츠 분야 계약서가 10년짜리라면, ‘자고 일어나면 트렌드가 바뀐다’며 불철주야 작품활동에 매진하는 작가들을 기만하는 행태를 멈춰야 한다. 이미 많이 늦었지만, 함께 상생하는 업계를 만들고 살아남기 위해선 지금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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