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영우”가 슈퍼스타가 된 이유

 

 

 

요즘 ENA에서 방영중인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난리입니다. 어딜 가나 “우영우 봤어?”로 시작하는 대화가 가장 좋은 대화를 시작하는 소재인 것 같아요. 칼럼 지면에서도 <우영우> 얘기는 빠지지 않습니다. 드라마 <우영우>가 자폐를 다루는 방법, 그리고 자폐인의 삶을 다루는 방식과 시선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룹니다.

 

여느 때와 같다면 <우영우>를 방영하는 ENA와 KT와의 관계, 그리고 티빙의 KT 시즌 합병 등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이 얘기는 재미없으니까 나중에 하기로 하죠. 에디터는 개인적으로 <우영우>가 자칫 첨예하게 대립할 수 있는 이야기를 잘 풀어낸 수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부분은 박은빈이라는 배우를 포함한 많은 배우들의 연기에, 또 많은 부분은 문지원 작가의 각본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외에도 유인식 감독의 연출도 한몫 했겠죠. 우리는 드라마를 다루는 매체는 아니니까, 개인적인 감상은 이쯤 하고 <우영우>라는 작품이 어떻게 슈퍼스타 작품이 될 수 있었는지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 사람들은 판타지에 속을 준비가 되어있다. 하지만.

 

드라마 속의 사람들은 만화 속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판타지 속 사람들입니다. 장르가 판타지가 아닐 뿐, 상상속의 인물이라는 점에서 같습니다. 자폐 스펙트럼 중에 아주 적은 서번트 증후군, 그 중에서도 ‘변호사’라는, 사회에서 인정받는 직업에 유리한 스펙트럼에 해당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정답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드라마다”입니다. 핵심을 봐야 해요.

 

많은 시청자들은 이 핵심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의사 드라마를 보면서 “에휴 무슨 의사가 저러냐”며 비판하는 사람들은 드라마를 즐길 준비가 안 된 사람들이죠. <우영우> 속 우영우도 마찬가집니다. “대형 로펌에 막 들어간 변호사가 다크서클 하나 없이, 커피도 한잔 없이…!”하고 분노하는 시청자는 눈에 띄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판타지에 속을 준비가 되어 있죠.

 

자, 여기서 웹툰의 판타지성과의 차이를 찾아볼 시간입니다. 웹툰의 판타지성은 아무래도 영상매체인 드라마보다 몇 단계씩 앞서갑니다. 회귀, 빙의, 환생뿐 아니라 고대, 중세, 미래, 지구, 우주, 이세계 등등 다양한 판타지를 덧입힙니다. 현실의 세계에 강하게 묶여 있는 사람들, 즉 소위 ‘킹반인’들은 새로운 세계를 ‘배워야만’ 합니다. 판타지에 속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해도, 현실을 배경으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정도에서는 가볍게 받아들이는 정도인 거죠. <이태원 클라쓰>나 <우영우>처럼요.

 

그래서 소위 어려운 말로 ‘핍진성’ 이라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핍진성을 풀어 쓰면 여러가지 번역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저는 ‘이야기가 가지는 설득력’ 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식백과에서는 “문학작품에서 텍스트에 대해 신뢰할 만하고 개연성이 있는, 즉 그럴듯하고 있음직한 이야기로 독자에게 납득되는 정도”라고 설명하고 있네요.

 

장르 얘기하면 맨날 소환되는 단골, <오징어 게임>

 

하지만 이미 장르의 세계로 한 발 넘어간 사람들에게는 ‘이정도도 말이 되잖아?’가 됩니다. 하지만 다수의 대중에겐 그렇지 않았던 거죠. <오징어게임>이 대단했던 건 바로 ‘데스게임’이라는 장르 규칙을 그럴싸하게 설득력을 갖추고, (넷플릭스를 타고) 전세계인을 사로잡은 그 설득력에 있을 겁니다. 잘 짜여진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때로 설득력은 압도적인 비주얼로, 또 스타일리시함으로, 아니면 거대하고 웅장한 것에서 느껴지는 숭고함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네, 이런 것들에 대해 설명하는게 미학이죠.

 

지구를 떠나 웜홀에 갔다가, 블랙홀에 다녀오는 바람에 늙어버린 딸과 만나는 아저씨의 이야기. 바로 <인터스텔라>가 1천만명 이상의 관객을 모았던 이유도 우주의 거대함과 웅장함에 압도되는 감각이 크게 한몫 했을 겁니다. <우영우>는 그렇게 속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의 빈틈을 날카롭게 파고 들어간 작품입니다.

 

*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합의

 

드라마 속에는 아주 착한 사람들이 주로 등장합니다. “’보통’ 변호사에게도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가 “보통 변호사라는 말은 잘못됐다”고 그 자리에서 수정할 수 있는 상사, 고등학교 시절부터 항상 햇살 같았던 친구,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변호사를 채용하고 바로 일을 맡길 수 있는 대표, 그리고 영우를 사랑으로 길러낸 아버지까지.

 

<우영우>를 비판하는 시청자 중에는 이런 판타지성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일리있는 말입니다. ‘핍진성’이 설득력을 의미한다면, 현실을 생각하는 순간 이 설득력은 깨져버립니다. 우리는 현실에서 얼마나 많은 차별과 말도 안 되는 목소리를 의견으로 받아들여야 했나요? 그걸 생각하면 <우영우>의 판타지성은 마치 동화처럼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바로 이 지점이 우영우가 좋은 작품이 되는 진가가 드러나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재현이나 ‘보여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시청자들이 <우영우>라는 드라마가 ‘좋은 드라마’라는 전제 하에서 현실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드라마의 한계를 이야기하는 것. 작품을 깎아내리거나, 폄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영우>라는 작품이 가지고 있는 좋은 점은 긍정하되 현실이 ‘드라마가 판타지일 것’임을 100% 받아들이기에 주저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는 지점이 말이죠.

 

보통 이런 경우에 나오는 반응은 “현실은 이러이러한데 작품이 그걸 담아내지 않는 방식으로 왜곡하고 있다”는 날 선 반응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영우를 다룰 때에는 “<우영우>는 세심하게 신경을 많이 썼다. 하지만 현실은 이렇다”는 반응이 주로 눈에 띕니다. 또, 그러면서 드라마가 그려내지 않은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하고요. 저는 이 반응이 이채로웠습니다.

 

얼굴만 봐도 열받는 캐릭터는 얼마나 소중한지. (출처=ENA)

 

또 최근화에서 작품 속 등장인물인 ‘권모술수’, 권민우라는 캐릭터를 통해 한국의 현재 상황을 꼬집듯이 풀어내는 부분에 감탄한 시청자들이 꽤나 인상적이었습니다. 현실의 장애인 이동권 시위를 보는 시선과, 작품 속 ‘권모술수’에 분노하는 사람들의 간극도 인상깊었습니다. 물론, 둘을 하나의 동질성 있는 ‘대중’으로 보긴 어렵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적으로 이입을 유도하는 드라마에서 보이는 반응과 뉴스에서 보이는 반응이 너무 달라서 의아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우영우>가 그만큼 잘 만든 드라마라는 거겠죠. 그래서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합의를 바탕으로 한 평가들이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웹툰에도 있다. 그런 작품.

 

웹툰에도 그런 작품들이 많습니다. 현실의 문제를 소환하고자 판타지성을 가져온 작품들. 아마 이글을 읽는 여러분의 머릿속에도 ‘비슷한 작품 있는데?’ 하는 의문이 지나갔을 겁니다. 그렇게 현실의 문제를 다룬 작품이 많음에도, 그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우영우>만큼 화제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이건 매체가 가지고 있는 차이, 즉 만화 독자와 드라마 독자가 포괄하는 ‘대중’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웹툰으로 만들어지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출처=에이스토리)

 

그런 <우영우>가 웹툰으로도 만들어집니다. 유일, 화음조 작가의 콤비가 각색과 작화를 통해 <우영우>를 웹툰으로 만듭니다. 보통은 웹툰의 독자들이 드라마나 영화로 작품이 만들어질 때 ‘원작을 잘 살려라’라고 주문을 외우지만, 이번에는 어떨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례가 많지 않기도 해서 기대가 되는 한편, 매체의 차이 때문에 오는 간극을 어떻게 메울지도요. 이런 고민이 바로 ‘우영우’라는 캐릭터를 슈퍼스타로 만든 매력이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우영우>에 쏟아지는 폭발적인 반응을 보면서, 에디터는 웹툰 평론가로서, 또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많은 자극을 받았습니다. “현실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했다”라는 비난과 “드라마는 세심하게 신경을 썼지만 현실은 이렇다”는 비판 사이의 간극이 ‘명작’과 ‘망작’을 가르는 한가지 기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작품에 대해서 더 많이 이야기 해야겠다는 다짐도 했습니다.

 

우리가 만나게 될 세계는 앞으로 더 많은 포용과 이해, 그리고 더 뾰족하고 날카로워진 취향의 세계일 겁니다. 작품 속 세계에서 살다가 현실을 잊는다면 그것도 문제고, 현실만을 보다가 작품을 한심하게 보는 어른이 되면 그것도 슬픈 일입니다. 재미있는 작품을 즐기면서 현실의 문제를 논의하고, 또 ‘더 나은 세상’을 살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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