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더 복서”가 전해주는 별들의 이유

 

 

2021년 가장 많이 추천한 만화를 꼽으라면 단연 정지훈 작가의 <더 복서>입니다. 연초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제발 <더 복서>좀 봐달라’고 이야기했고, 웹툰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도 <더 복서>는 재밌더라고 할 때면 뿌듯함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아직 완결이 나지 않았지만, 최근 연재된 103화 ‘the Boxer’편까지 보고 나서 확신이 들었습니다. 올해, 2021년의 웹툰은 <더 복서>구나.

 

?명목상의 주인공, 텅 빈 먼치킨

사실 휴재 직전인 98화까지만 해도, 이 작품은 웹툰 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할만 한 작품입니다. 재능은 있지만 실력은 없던 주인공이 노력과 근성, 그리고 우정과 팀워크를 통해 승리하게 된다는 스포츠물의 클리셰가 적용되지 않는 주인공을 등장시킨 것 만으로도 주목받을만 하죠. 하지만 주인공으로 보이는 ‘유’는 텅 비었습니다.

천부적인 재능 하나만 갖추었을 뿐 나머지는 아예 등장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왜, 어떻게, 무엇때문에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됐는지는 최근 회차를 통해 공개됐죠. 독자들은 ‘유’가 갑자기 미국으로 떠나 트레이닝을 받게 된 이유에 대해서 짐작만 할 뿐이죠. 또, 유가 복싱을 하는데에 어떤 목적이나 감정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냥,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거죠.

오히려 보통의 만화에서 주인공에게 주어져야 할 감정의 기복, 기쁨, 슬픔, 패배의 고통은 모조리 링 위의 상대방에게 주어집니다. 당연히 주인공 ‘유’는 악당의 포지션으로 자리잡을 것 같지만, 그마저도 트레이너인 K의 몫이지 ‘유’에겐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저, 전체급 석권까지 단 한 번의 유효타도 허용하지 않고 펀치를 날릴 뿐인 무자비한 기계처럼.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링 위에서 ‘유’는 절대로 지지 않는다는 걸.

 

? ‘복싱’이어야만 했던 이유

보통 이런 주인공이라면, 독자들은 혼란스럽습니다. 주인공인 ‘유’가 이길 것을 우리는 압니다. 아니, 링의 상대방으로 선 사람들이 단 한번의 펀치도 성공시키지 못할 것을 압니다. 그런데 링 위의 반대편에 선 사람들은 오히려 주인공처럼 보입니다. 그건 주니어웰터급 챔피언인 다케다 유토의 에피소드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장 삐에르 마뉘엘은 ‘완벽에 대한 집착’이 지나쳐서 오히려 판타지적이었다면, 다케다 유토는 정말로 우리가 이상적으로 그려왔던 스포츠 만화의 주인공 타입이니까요. 재능은 없지만, 오로지 끈기와 노력만으로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 사람. 다케다의 일대기만으로도 웹툰 한 편이 머리속에 그려집니다.

바로 이것. ‘독자의 머리속에 그려진다’는 점을 정지훈 작가는 철저하게 이용합니다. 이미 그려지는 건, 우리의 머리속에서 그려지게 놔두는 거죠. 그래서 링의 반대편에 선 ‘유’가 주인공이고, 독자들이 주인공을 응원하는 열망은 반대로 “‘유’가 한 대라도 맞았으면 좋겠다”로 바뀝니다. 장 삐에르 마뉘엘, 다케다 유토, 산토리노 형제, 빅토르, 아론 타이드까지. 링 위에 선 사람들은 모두 전통적인 스포츠물이라면 주인공, 주인공에게 조언하는 선배, 라이벌, 감초 역할을 맡았을 캐릭터들입니다. 그러니까, ‘유’가 없었다면 저들만 가지고도 한편의 극이 완성되는 캐릭터들인 거죠. 하지만, 그건 우리의 머리속에 그려지니까 그걸 다 깨부술 ‘유’가 주인공이 됩니다.

네, 유는 악당입니다. 절대적 강함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철저하게 때려부술 뿐인 절대적 강함을 가진 폭군입니다. 다만, 그건 링 위로 한정됩니다. 그게 <더 복서>가 복싱만화여야 했던 이유입니다. ‘유’는 완전히 무너진 내면을 가진 사람이고, 그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 링 위에서만 구현됩니다. 악당이 악당일 수 있는 조건, 그리고 독자들이 그를 인간적으로 연민하되, 동시에 경이의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조건이 바로 사각의 링 위에서 구현됩니다. 스포츠의 세계에서, 그러니까 사각의 링 위에서는 악당이 되는 것이 허용되기 때문이죠.

 

?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텅 비어버렸던 ‘유’는 아론 타이드와의 대전에서도 답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J와의 대전이 다가오면서, 우리는 작가가 그렸던 큰 그림을 마주하게 됩니다. 1화에서 “이 별들은 모두 너를 위해 빛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던 전설의 복서, J와의 대결이 예고되죠.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절망, 그 안에서 살아남은 소년. 하지만 살아남은 대신 모든 감정과 의미를 잃어버린 소년은 말 그대로 허무주의의 화신이 됩니다. 인간은 모두 죽고, 시간 앞에서 우리의 패배는 결정되어 있습니다. 마치 링 위에 오르는 사람들이 ‘유’에게 단 한번의 펀치도 날리지 못했던 것처럼, 우리는 모두 살아가고, 늙고, 죽게 될 겁니다.

너무나 큰 고통과 좌절, 그리고 절망 앞에서 우리는 묻습니다. 만약 신이 있다면, 우리를 사랑하는 신이 정말로 있다면 왜 이 모든 고통을 지켜보고만 있는지, 나서서 뭐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 이 삶의 모든 고통속에 어떤 의미가 있냐고요.

그러니까, ‘유’는 인간의 회의와 허무주의의 화신입니다. 악에 받혀 소리치건,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생각하건, 우리는 한번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난 수천년간 철학의 가장 궁극적인 질문이고, 또 그만큼 나름의 답이 나와있는 명제기도 하죠. <더 복서>는 사각의 링 위에서 죽음의 공포를 넘나드는 수많은 순간을 쌓아올려 이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인간의 존재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시간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감, 그 안에서 어떻게 희망을 찾을 것인가?

천문학자이자 작가인 칼 세이건은 저서 <코스모스>에서 이런 말을 남깁니다. “우리는 모두 별의 자손이다”. 과학자의 말이라 그런게 아니라, 이건 정말 과학적인 사실입니다. 모든 물질은 별에서 만들어지고, 우리도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니까요.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멀리에서 지구를 찍은 사진, ‘창백한 푸른 점’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1990년 2월 14일, 보이저 1호가 촬영한 지구. <창백한 푸른 점>

 

죽음으로 가득 차서 의미를 알 수 없는 우주에서, 아주 작은 점으로 찍힌 지구를 보고 칼 세이건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주라는 광대한 스타디움에서 지구는 아주 작은 무대에 불과합니다. 인류역사 속의 무수한 장군과 황제들이 저 작은 점의 극히 일부를, 그것도 아주 잠깐 동안 차지하는 영광과 승리를 누리기 위해 죽였던 사람들이 흘린 피의 강물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저 작은 픽셀의 한 쪽 구석에서 온 사람들이 같은 픽셀의 다른 쪽에 있는, 겉모습이 거의 분간도 안되는 사람들에게 저지른 셀 수 없는 만행을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잦은 오해가 있었는지, 얼마나 서로를 죽이려고 했는지, 그리고 그런 그들의 증오가 얼마나 강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위대한 척하는 우리의 몸짓, 스스로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믿음, 우리가 우주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망상은 저 창백한 파란 불빛 하나만 봐도 그 근거를 잃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우리를 둘러싼 거대한 우주의 암흑 속에 있는 외로운 하나의 점입니다. 그 광대한 우주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안다면, 우리가 스스로를 파멸시킨다 해도 우리를 구원해줄 도움이 외부에서 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J와 ‘유’의 대결은, 칼 세이건의 이 말에 대한 헌사입니다. 별들은 왜 존재하는 걸까요? 우리는 왜 존재하고,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거대한 공간에서 아무것도 아닌 우리는 그럼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절망에 빠지곤 합니다. 물론, ‘유’에겐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고, 이미 갈데를 잃어 차갑게 굳어버린 분노, 절망은 그에게 단 한번도 살아야 할 이유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렇기에, 복싱이어야만 했습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든 것을 담아 펀치를 날리고, 가장 내밀한 대화보다 더 깊은 소통을 나누게 되는 사각의 링 위에서, <더 복서>는 ‘유’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존재 이유에 대해 질문합니다. 오로지 두 사람만이 허용되는 공간에서, 우리의 가장 깊은 절망과 무의미가 사실은 그렇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인간 뿐이고, 시간이 정해진 링 위의 싸움처럼, 우리의 시간은 정해져 있습니다. 링 위에서는 싸워야만 합니다. 하지만 사각의 링이 아닌 창백한 푸른 점은 어떤가요. 아니, 심지어 링 위에서도 그러지 않기로 결정한다면요?

103화의 마지막에서 J가 ‘유’에게 건넨 것은, 1화에서 J가 꼬마 ‘유’에게 건넸던 말의 연장입니다. 이 별들은 모두 너를 위해 빛나고 있고, 그건 우리가 모두 별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가장 치열한 승부의 장, 목숨을 걸고 링 위에 올라 피투성이가 되는 전장에서, J는 “복싱이 사랑과 닮았다”고 말합니다. 우주라는 무대에서, 지구는 둥근 링입니다. 우리는 삶을 전쟁으로 받아들이고, 때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별들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더 복서>는 그걸 이야기하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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