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50살 된 한국 만화가협회… 1968년부터 오늘까지의 역사 간략하게 돌아보기

한국만화가협회가 창립 50주년을 맞았습니다. 햇수로 51년이니 만 50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국만화가협회는 엄혹했던 1960년대 말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한국만화가협회가 생긴지 50년, 지난 시간을 간략하게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1960년대: 검열, 독점, 그리고 창립

 

1960년대 중반이 되면 소위 ‘신촌 대통령’이라고 불렸던 이영래 회장과 출판사들이 ‘합동’이라는 이름으로 만화시장을 독점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반대하기 위해 작가들이 모여 출판사를 만들어서 활동해보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죠. 우리나라 만화시장에 ‘자본’이라고 부를만한 돈이 개입하기 시작한 첫 시기라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창작만화가 아니라 일본 만화를 베껴 그리거나 인기작을 베껴 그리는 일이 횡행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이라면 상상하기 힘든 일들이 벌어지던 시대였던 셈이죠.

 

 

1968년 10월 15일 동아일보에 실린 아동만화가협회 발기인대회

 

 

믿기 어려운 일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1968년 당시 문화공보부는 ‘한국아동만화윤리위원회’를 조직, 원고를 직접 심의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원로 선생님들은 “원고에 빨간펜으로 단어부터 그림까지 다 고쳐오라고 그어서 돌아오곤 했다”고 증언합니다. 만화가가 그리는 모든 원고를 정부에서 사전에 심의하고, 수정안까지 적어서 돌려보내곤 했다는 겁니다. 지금은 정말 상상하기 어려운 엄혹한 시대였죠.

 

작가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1968년 10월 11일, 사단법인 한국아동만화가협회를 출범했습니다. 당시에는 일본만화나 인기작을 베껴 그리는 만화가를 회원으로 받지 않기 위해서 시험을 봤다고 합니다. 그렇게 총 3차에 걸쳐서 치른 시험에 합격한 회원 147명이 정회원으로 확정됩니다. 초대 회장은 박기정 선생님이 선임되었습니다.

 

 

1970년대: 아동만화가협회에서 한국만화가협회로

 

1971년 만화가협회는 한국도서잡지 윤리위원회로 통합된 사전심의를 거부하고 자율심의를 도입하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갑니다. 당시 만화가 중에서도 인기 작가의 위상은 연예인 못지 않았다고 하는데, 국립공보관에서 ‘만화작품전’을 여는가 하면 예술인 야구대회에 만화가들도 참여하고, 방송 출연이나 보육원 방문같은 사회봉사도 만화가들이 하는 일중에 하나였습니다. 점점 만화시장이 커지고 장르도 다양해지면서, ‘한국아동만화가협회’는 1975년 7월, 협회명을 ‘한국만화가협회’로 변경합니다.

 

 

만화가들이 낙도 어린이들을 방문한 것이 신문에 실리던 시절입니다. 1977년 5월 24일 경향신문

 

 

당시 만화에 가해진 심의는 우리나라 만화들을 대부분 ‘권선징악’을 주제로 다루도록 제한했고, 동시에 어린이들이나 좋아하는 ‘저질만화’라는 인식, 일본 만화를 베끼는 조잡한 만화라는 인식이 주를 이루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만화에 대한 사회 전체의 비판과 비난이 격렬하던 1970년대 초반, 만화방이 많았던 동네는 우범지대, 불량한 곳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진것도 이때가 시작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을 정도입니다.

 

 

 

 

1971년 사전심의거부를 의결한 만화가협회. 1971년 10월 19일 경향신문?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60년대 주류를 이루던 1-2페이지 만화에서 본격적으로 대본소 만화가 성장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단행본 형태의 만화가 일반적으로 유통되고, 잡지처럼 묶어서 연재하는 형태의 만화도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협회명을 ‘한국만화가협회’로 바꾼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만화가 빠르게 바뀌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1980년대: 만화방 전성시대, 만화 전문 잡지 등장

 

1980년,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소위 ‘사회정화운동’을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사회악’중 하나인 불량만화를 출판한 14명을 구속하고, 만화가 69명을 미성년자보호법 위반으로 고발하는 일을 벌입니다. 그러자 만화가협회는 1980년 11월 5일, 출판업자들과 협회원들이 모여 ‘자율정화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정부의 검열과 폭압에 맞서 자율규제를 이야기하는 행동이었던 셈입니다.

 

신군부의 검열에 맞서 불량만화 추방 자율정화대회를 개최한 작가들. 1980년 11월 5일 동아일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화는 당대 최고의 인기 콘텐츠였습니다. 올해로 마흔살이 된 ‘까치’는 80년대 최고의 인기 캐릭터였고, 1983년 출간된 이현세 선생의 <공포의 외인구단>역시 극화체 열풍의 시작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만화를 볼 수 있는 곳은 만화방이었고, 만화방에서는 극화만화, 직선적이고 선이 굵은 서사를 가진 작품들이 많이 유통되었습니다.

 

동시에 1982년 창간된 <보물섬>과 같은 만화잡지들 역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보물섬>은 한국 만화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빠져선 안되는 잡지가 되었죠. <아기공룡 둘리>, <맹꽁이 서당>, <달려라 하니>, <펭킹 라이킹>등 유명한 작품들이 연재되었던 잡지입니다. 80년대 후반이 되면 <아이큐 점프> 등이 등장하면서 만화전문잡지의 시대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화가들은 여전히 군부독재의 심의에 맞서 싸워야 했죠. 1988년 이현세, 허영만, 이희재 선생은 한국도서잡지주간신문윤리위원회가 주는 ‘한국만화상’의 수상을 거부하며 “한국만화문화 발전에 장애가 되어 온 심의기구가 주는 상은 받을 수 없다”고 거부하기도 합니다.

 

 

1990년대: 천국의 신화, 그리고 청소년 보호법

 

1990년대가 되어 군부독재가 무너지고 민주정부가 들어섰지만 여전히 만화에 대한 인식은 개선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 초, 당시 만화가협회는 앙굴렘 국제만화축제에 참여하고, 만화박물관에 방문해 교류를 시작하는 등 여러가지 활동을 시작합니다. 1990년대 말에는 최초로 홈페이지가 등장하기도 했죠.

 

하지만 1990년 중반에 정부가 청소년보호법 입법을 추진하면서 만화가들이 투쟁에 나서게 됩니다. 만화가협회를 중심으로 한 수백명의 작가들이 여의도에 모여 만화인 결의대회를 11월 3일부터 시작합니다. 현재 ‘만화의 날’의 시작입니다. 이런 투쟁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청소년보호법을 1997년 7월 시행했고 당시 10개 만화유관단체가 모두 힘을 합쳐 만화사랑 서명운동을 개최하기도 합니다.

 

1997년 7월 25일 한겨레신문. “이현세씨 만화 사법처리 검찰-만화계 입장”

 

그런데 서울지검이 <천국의 신화>를 그린 이현세 선생을 미성년자 보호법 위반혐의로 약식기소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5년이 지난 2003년에야 대법원이 무죄를 확정해 사건이 종결됩니다.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를 장식한 ‘표현의 자유’와 연관된 만화계의 가장 긴 싸움이 끝나는 순간이었습니다.

 

 

2000년대~현재: 대여점 몰락과 웹툰의 등장

 

2001년, 여의도에서 700여명이 모였던 11월 3일을 기리기 위해 ‘만화의 날’을 기념하며 아트선재센터에서 첫 만화의 날 기념식이 열립니다. 그리고 2001년 12월, 만화가협회가 지금 위치한 협회 사무국 명동시대를 맞게 됩니다. 이렇게 한 페이지가 장식된 2000년대 초반, 만화시장은 사실 얼음판을 걷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잡지들은 대부분 발매부수가 줄었고, 단행본 시장 역시 대여점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작가들은 새로운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직접 연재였습니다. 홈페이지등을 통해서 직접 연재를 하던 작가들 중에 대표적인 작가가 강풀 작가, 김풍 작가, 스노우캣 작가 등입니다. 특히 강풀 작가는 2003년 장편웹툰 <순정만화>를 연재합니다. 현재 웹툰과 비슷한 형태의 스크롤 최적화를 노린 초기 대표작품으로 꼽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2012년 작가들이 사용했던 ‘노컷운동’ 이미지의 일부

 

 

이후 네이버와 다음등 포털을 중심으로 한 웹툰이 등장했고, 2010년대 초반이 지나자 웹툰이 본격적으로 산업의 규모로 성장하며 최근 5년간 눈부신 성장세를 기록하게 됩니다. 놀라운 성장을 거듭하기 직전, 잠잠했던 정부와 만화가들의 갈등은 2012년 본격적으로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가 웹툰 심의계획을 발표하면서 “NO CUT”운동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제서야, 길고 긴 싸움의 끝에서 웹툰 자율규제를 위한 업무협약을 방심위와 맺고 자율규제체계를 정립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는 현재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만화가협회의 50년은 말하자면 정부의 검열, 표현의 자유 침해와 맞서는 시간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본적인 것이 지켜지지 않던 시절과 지금을 비교하긴 힘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운 창작의 토대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지금의 웹툰이 있게 한 밑바탕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다가올 50년, 보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협회로 나아가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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