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행’같은, ‘실수’같은 소리 하네

 

 

1월 초, 꼬박 한달 전 김금희 작가가 모 문학상의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는 전화를 받고 기뻐했으나, 계약서를 전달받고 참담해졌다는 글을 소셜미디어에 업로드한다. 그 계약서에는 3년간 저작권을 ‘양도’하라고 요구했으며, 작품의 표제작으로도 사용할 수 없고 다른 단행본에도 수록될 수 없다고 했다. 결국 작가는 상을 거절했고, 이 내용을 본 다른 작가가 ‘내가 수상할 때에는 그런 내용이 없었다’고 전했다. 김금희 작가에겐 ‘통상적인 룰’이라고 설명했던 내용이다. 이 소식을 접한 작가들은 #문학사상사_업무_거부 해시태그를 통해 앞으로 문학사상사와 함께 일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했고, 수상을 거절한 다른 작가들은 물론 2019년에 이 상을 받은 윤이형 작가는 절필 선언을 했다.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 또는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이었던 것. 이상문학상에 대한 실망의 목소리와 분노의 목소리가 뜨거워지자 이상문학상을 개최하는 문학사상에서는 ‘대상에만 적용되는 것이었는데, 직원 실수로 우수상에도 포함되었다’고 말했다. 통상적인 룰이라고 작가에게 해명했다가, 실수라고 정정했다가, 마지막에는 책임 회피를 인정한다고 사과했다. 공교롭게도 이 문학상에 이름이 들어간 시인 이상은 기존의 문학적 체계를 뒤흔드는 새롭고 실험적인 시도로 주목받은 작가였다. 새롭고 실험적인 시도가 아니라 ‘통상적인 룰’이라는 말로 작가의 저작권을 갈취하는 케케묵은 수법을 ‘이상’이라는 이름을 걸고 저질러 왔다는 사실에 독자들은 분노했다.

 

2월 4일, 꼬박 한달이 걸려서 발표한 사과문에서 “(주)문학사상은 그간 문학에 대한 진정성과 자긍심 하나로 수많은 고비를 지나왔습니다. 월간 《문학사상》 또한 수없이 많은 폐간 위기를 겪으며 현재 지령 568호를 맞았습니다.”라고 전하면서 “최근 경영 악화로 본사 편집부 직원들이 대거 퇴직하며 일련의 상황에 대한 수습이 원활하지 못했습니다.”라고 전했다. 경영상의 어려움이 어디서 왔는지, 왠지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문학사상사 회장이었던 임홍빈씨는 100억대 배임을 저지르고도 1심 징역 3년, 2심에선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재판부는 30년간 한국 문학에 기여한 공로를 참작의 사유로 삼았다. 불과 3년 전의 일이다.

 

 

뻔뻔함의 근원을 찾아서

 

작가의 면전에 거짓말을 하도록 만드는 이 뻔뻔함은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하다. 출판사의 저작권 갈취로 인한 사과문에 “저작권 인식이 부족했다”라는 문구가 나오는 걸 보고 기가 찼다. 작가와 저작권과 관련한 계약을 하는 곳에서 저작권 인식이 부족했다니? 나는 이걸 ‘혼나본 적이 없는 사람의 용감함’이라고 부르고 싶다. 100억대 배임을 저질러도, 저작권 이해가 부족해도 40년이 넘은 명망있는 문학상을 운영할 수 있다고 믿는 용감함은, 단 한번도 잘못을 지적 받고 제대로 고쳐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뻔뻔함은 미덕이 아니지만, 뻔뻔함으로 위기를 돌파해 온 사람에겐 무기가 된다. 불행하게도, 작가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조건을 내걸면서 출판사와 문학상의 이름, 그리고 상금을 걸고 저작권을 집어삼키는 일이 유별난 경우가 아니다. 만화-웹툰계에서도 이런 일이 적지 않다. 특히 신인작가에게 데뷔를 미끼로 일방적으로 불리한 계약을 내밀면서 ‘업계 관행’이라는 거짓말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다.

 

거짓말로 얻어낸 계약이라고 할지라도 계약에 서명하면 법적 효력이 생기기 때문에 이를 뒤집기는 쉽지 않다. 백희나 작가의 <구름빵> 사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백희나 작가는 2016년 <구름빵>의 단독저자로 인정받았지만, 계약서상 저작재산권을 양도하는 매절 계약을 해 이를 뒤집기 위한 소송을 계속해왔다. 그러나 지난 1월, 재판부는 “계약이 체결된 2003년 당시 백씨가 신인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상업적 성공 가능성에 대한 위험을 적절히 분담하려는 측면도 있다”며 “따라서 백씨에게 부당하게 불리한 조건이라고 볼 수 없으므로, 불공정한 법률행위라 무효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당시 한솔교육으로부터 백희나 작가가 받은 돈은 850만원, 이후 지원금을 모두 합쳐도 2천만원이 채 되지 않는다. 계약 이후 11년이 지난 2014년까지 <구름빵>이 창출한 매출액 추정치만 4,400억원이다. 출판사가 저작권을 잘 몰랐을까? 아니, 모를 수가 있을까? ‘이해가 부족하다’는 말은, 저작자의 입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말일까? 궁금증만 늘어난다.

 

 

그럼, 만화는?

 

만화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메가히트작인 <그리스 로마 신화>를 펴냈던 가나출판사는 책의 판매 부수를 작가에게 속였다가 소송을 당했다. 실제로는 1천만부가 넘게 팔린 책을 370만부가 팔렸다고 속였다. 가나출판사는 작가에게 원래 지급해야 했던 돈에 더해 이자까지 지급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60-70년대 인기 작가들은 “인쇄소에 직접 가서 단행본을 세어 봐도 정확한 판매 부수는 출판사만 안다”면서 “속이려고 작정하면 알 방법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유구한 역사를 가진 판매부수 속이기인 셈이다.

 

알 길이 없어 당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전산으로 기록이 남는다. 애초에 그걸 기록하지 않고, 회사도 정말로 모르는 판매량이라면 그건 회사가 필요 없다는 말과 다름없다. 그러나, 최근에도 정확한 정산자료를 요구하는 작가에게 “우리가 그럴 의무는 없다”며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계약을 해서 연재를 하고, 연재를 해서 판매한 작품의 숫자에 대해 명확하게 확인을 시켜줄 의무가 없다면 계약상에 어떤 의무를 진다는 말인지 또 다시 의문이 늘어난다.

 

작가 입장에선, 특히 신인 작가의 입장에선 계약서를 꼼꼼히 살펴봐도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기 힘들다. 물론 대다수의 업체들은 충분히 설명하고 계약서를 검토할 시간을 준다. 하지만 일부 업체에서는 비밀유지조항을 근거로 검토를 막거나, 일방적으로 작가에게 불리한 조건을 부여하거나, 제대로 계약내용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또는 공모전이나 교육을 빌미로 참여작, 당선작 또는 교육 대상작의 저작권이 주관단체에 귀속된다는 조건을 내건 곳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구두로 얘기했던 내용과 서면으로 받은 계약서의 내용이 다른 경우, 시즌을 종료하고 새 시즌 계약을 할 때 이전 계약과 내용이 달라졌거나, 업체의 의중에 따라 계약 파기를 결정할 수 있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원 저작자의 단독 저작물임에도 저작재산권을 공동 소유하는 경우도 있었다.

 

 

계약, 계약, 그놈의 계약

 

계약은 쌍무적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진다. 때문에 계약서에 서명하면 쌍방이 그 내용에 합의한 것으로 보고, 상대가 계약 내용을 어기지 않으면 이를 뒤집기는 쉽지 않다. 때문에 일부 업체들은 ‘업계 관행’이나 ‘통상적으로 다들 이렇게 한다’면서 작가들에게 계약을 체결하자고 부추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 뿐만 아니라 계약 내용 변경을 요구해도 ‘다른 작가와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식으로 변경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업체도 있다.

 

하지만 계약은 쌍무적인 동시에 독립적이다. 나의 계약이 다른 사람의 계약에 영향을 미쳐선 안된다. 객관적이고 명확한 기준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 계약은 이런 기준을 바탕으로 쌍방간의 협상이 토대가 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일방의 강요가 아닌 협상이다. 그래서 그 협상 과정을 거친 후에 서명했다고 보기 때문에 상호간에 ‘합의’했다고 본다. 그렇다면, 업체에서도 작가의 작품을 싣고 싶다면 협상에 열린 태도로 나와야 한다. 하지만, 작가, 특히 신인 작가가 그 기준을 알기는 너무나 어렵다. 업체에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작가에게 설명하고, 작가의 동의를 얻는 과정이 필요한 이유다.

 

이런 과정이 어렵기 때문에, 문체부와 만화가협회 등 다양한 단체에서 표준계약서를 만들고 배포하는 한편, 매번 달라지는 업계 상황을 따라잡기 위해 계약 가이드를 제작 및 배포(연관링크: 한국만화가협회 ‘만화-웹툰 공정계약 가이드’ 발간)하고 있다. 일부 업체에서는 ‘표준계약서대로 계약하면 업체는 살아남기 힘들다’고 말하지만, 앞서 언급한 사례들을 보면 부끄럽지는 않은지 묻고 싶을 때가 있다. 

 

 

나는 이런 ‘관행’의 이유를 찾기 위해 고민했다. 그러나 최규석 작가의 <송곳>에 등장해 자주 인용된 “여기선 그래도 되니까” 라는 문장 외에 다른 이유는 찾지 못했다. 업계 관행은 누가 만드는가? 왜 업체의 일방적인 요구가 ‘관행’이 되는가? 명확한 기준 없이, 본인들이 작성한 계약서에 제대로 설명할 줄도 모르는 곳이라면 상대방 탓을 하기 전에 본인들의 수준을 점검해봐야 한다. 제발, 일을 하려고 만났으면 일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또한, 일부 직원의 오해로 인한 ‘실수’였다며 개인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건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 세상에 어떤 회사가 계약서를 말단 직원이 알아서 작성해서 고객의 서명을 받아오도록 시키는지, 정말로 책임이 있는 최종 결재자는 몰랐는지 묻고 싶다. 알았다면 큰 문제고, 정말 몰랐다면 더 큰 문제다. 무지가 죄가 아닌 건 배우는 사람의 입장일 때 이야기다.

 

다행히 이번 이상문학상 사태는 작가들이 빠르게 연대하고, 출판사를 보이콧함으로써 한달만에 사과를 받아낼 수 있었다. 일련의 상황을 보면서 지난 몇 년간이 떠올랐다. 창작의 주체인 작가들이 업체에 ‘그래선 안된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웹툰계도 지난 몇 년간의 사건들을 거치면서 많은 곡절이 있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지켜보고 감시하며 목소리를 내야 한다. 작가와 업체, 쌍방이 동등한 계약의 주체로 협상테이블에 앉을 수 있게 되는 순간에도 말이다. ‘다들 그렇게 했으니까’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하겠다는 게으름을, 이제 창작자들은 더는 용서하지 않을 생각이다. 더 이상 ‘관행’이라는, ‘실수’였다는 소리에 침묵하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독자들도 함께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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